隨想(수상) [黑人(흑인)들의 마음] ⑤ 黑白(흑백) 問題(문제) 해결은 마음과 마음이
暴惡(폭악)하기론 黑白(흑백) 同一(동일)
白人(백인)의 그릇된 黑人觀(흑인관)으로 선
數(수)많은 著書(저서)로도 理解(이해)에 無爲(무위)
아프리카나 미국의 흑인 세계를 소개한 책들이 많다. 그러나 그 책들은 대개가 白人들에 의해 저술되었고 이 저자들 가운데는 旅行者로 黑人世界를 一周한 旅行所感을 쓴 것도 있지마는 그중에는 可히 平生을 그들 속에서 보내면서 오랜 세월을 두고 연구한 끝에 黒人들의 世界를 正確하게 소개할려고 무진 애를 쓴 책들도 많다. 그러나 그 어느 저서 한권도 「黑人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아주고 바로 소개한 것이 없다고 黑人 知識人들은 슬퍼하고 있다. 이처럼 남의 마음을 알아주는 일이란 어려운 일이다. 黑人들은 감사할 줄 모른다고 白人들은 말한다. 그들은 無知하고 폭行을 좋아하며 殘酷·殘忍한 야만들이다. 黑人世界는 「人間이 人間에게 대하여 非人間性」만이 행해지는 世界다. 그러므로 그들은 自治能力이 없다. 그들은 分離해서 그들만 따로 살려야하고 白人들과 같은 地位에 둘 수 없다. 黑人은 죽여도 白人을 죽인것 만큼 大罪가 되지 않는다는 極端의 植民主義者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은 흑인을 백인에게 奉 仕케하려고 創造하셨나니라』고 說敎臺에서 서슴치 않고 외친 목사님도 있었다. 이런 것들이 앞서 말한 저서들의 結論이요, 白人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흑인관이다.
아프리카의 어떤 土語에도 다 「感謝하다」는 말이 있다고 專門言語學者들은 말하고 있다. 다만 그들은 「感謝하다」는 表現을 하지 않을 뿐이다. 韓國사람도 感謝할줄 모르는 後進國民이라고 評하는 사람이 있다. 實際로 「버스」안에서 특히 女子에게 자리를 讓步해주어도 感謝하다는 말한마디 없는 것이 예사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형님이나 동생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었다고 그 형님이 日本人처럼 굽신 굽신하며 「아리가또」를 連發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自然스러운 일이다. 兄弟間이니까. 너무도 當然한 일이기 때문이다. 黑人들은 人間은 다 兄弟라고 느끼고 있다. 그들은 兄弟間에 나누는 일은 감사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
黑人의 세계처럼 나그네를 歡待하는 世界는 없다. 黑人들의 世界에는 손님을 잘 待接하라는 格言이 다른 어느 民族에서 보다 많다. 「분도聖人」께서 『내 집을 찾는 사람은 다 예수님이 오신 것으로 待接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나는 歐羅巴에서 분도會 修道院을 찾아 많은 신세를 졌고 食客노릇을 많이 했다. 내가 白人社會에서 「예수님」의 待接을 받은 곳은 聖분도會를 爲始한 各種 修道院뿐이었다. 다른 白人社會에서는 「文化人」 「體面」 「形式」 기타 「연민」 「애긍」 등의 待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聖분도會修院 門前에 知名人士로서가 아니고 「美國 救濟品」이나 哀乞하는 身勢라면 果然 「예수님」으로 歡待를 받았을까? 黑人들의 마음에는 「人間은 하나다.」 그들의 마음에는 「나그네」는 「예수님」이 아니라 「兄弟다」.
美國이나, 歐洲나, 그리고 우리의 新聞을 보라. 매일 얼마나 많은 犯罪記事로 充滿해 있는가? 黑人世界도 마찬가지다. 거기도 各種犯罪가 없지 않다. 黑人만 殘酷殘忍한 것이 아니다. 네로 王은, 또 데시우스는 얼마나 殘酷했던가? 「가스室」에서 가진 殘忍한 방법으로 6백만의 유테人을 학살한 것은 黑人이던가 白人이던가. 그리고 西部劇은 「人間」의 趣味가 어느 程度로 殘酷해야 直性이 풀린단 말인가. 人間은 다 모든 点에서 類似하다. 黑人의 「마음」은 韓國人의 「마음」과 같다. 그리고 白人들의 「마음」과 같다. 조금도 다르지 않다. 人間은 피부가 標準이 아니고 「마음」이다.
「黑白문제」의 解決은 慾心과 利己를 버리고 「마음」이 「마음」을 「領」해야 한다. 領聖體를 하듯이. 「黒人의 마음」이여 내 마음에 오소서. —끝-
金達湖(本社論說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