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論(무신론)과 對決(대결)키 위한 하나의 神學(신학) ⑦ 五, 敎會(교회)의 救世宣敎(구세선교)를 위한 素描(소묘)
敎會救世活動(교회구세활동)을 위한 原則論的(원칙론적) 假說(가설)로서
信仰(신앙) 自體(자체)보다 神(신)의 초라한 「이미지」에의 반발로 現代人(현대인)은 「偉大(위대)한」 神(신)을 希求(희구)
超越性(초월성)은 神(신)의 가장 重要(중요)한 屬性(속성)
信仰(신앙)은 投機(투기) 冒險(모험)처럼 前進(전진)하는 實存的(실존적) 企劃(기획)
발행일1967-07-16 [제577호, 4면]
휴매니즘 世俗化 現實主義 責任感 하는 따위가 動機가 되어 오늘날 蔓延된 無信仰을 對面하여 敎會는 그에게 委託된 救世福音을 어떻게 宣敎하여야 할 것인가? 筆者는 지금까지 敍上한 바 있는 現代無神論의 여러가지 動機를 起点으로 해서 이 자리에서 無信仰에 對處하기 위한 敎會의 救世宣敎를 素묘해 보기로 한다.
■ 숨어계신 하느님
筆者는 처음에 이 테마를 가지고 이 論稿를 시작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같은 테마를 敎會의 救世宣敎라는 좀 색다른 角度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필요가 있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그분의 超越性을 강조하여야 할 것이다. 아다시피 이스라엘이 겪었던 사막유랑의 經驗은 舊約 계시의 核心을 이루고 있는 테마이며 이 테마는 新約에 와서도 그 中心的 位置를 계속 保有하고 있다.
現代人이 나무라는 것은 神과 그 분의 存在를 믿는다는 사실 자체라기 보다는 흔히는 우리 信仰人이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神의 이메지가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것 없다는 것이다.
現代人이 期待하는 神의 이메지는 좀더 「偉大한」 神, 덜 「可笑로운」 神의 이메지이다. 神의 沈默만 해도, 그것은 神의 不在를 증거하기는 커녕, 神의 實在性을 逆說的으로 말해주는 表徵들 중의 하나이다.
『비록 非神聖化 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초월하신 어떤 다른 분(L'AUTRE)이 계시다는 前兆들을 지니고 있는 現世界에서 하느님은 계속 沈默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沈默은 베르나노스(G. BERNANOS)가 말한 바와 같이 神이 가지고 있는 特質中의 하나이다. 실상 人間, 神聖한 것, 그리고 하느님 사이의 三者關係는 무너져 가고 있지만 그 자리에는 또 하나 다른 意味의 現存이 들어서고 있다. 이 現存이란 곧 다름아닌 「완전히 다른 분」(LETOUT-AUTRE_의 말씀의 現存이다. (A VERGOTE PSYCHOLOGIE RELIGIEUSE - 宗敎心理學 - 부뤼셀 1966. P.94)
■ 所望의 하느님
現代人은 宗敎的體驗을 不信任하고 神께 接近하려는 여러가지 宗敎的試圖와 또한 傳統的으로 흔히 「하느님께의 동경」이라 일러 오는 것은 幼年期에 맛보던 充足感에 대한 退化的인 鄕愁에 지나지 않는다고 批判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 앞에서 무엇보다도 强調하여야 할 것은 信仰이란 退化도 아니요, 失樂園에의 再歸도 아니라는것, 그것은 앞으로 힘차게 前進하는 實存的 企劃이요, 온갖 파란곡절, 모험, 投機 이 모든 것을 각오하는, 마치 어느 兵士의 出戰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몇번이고 强調할 必要가 있다.
信仰은 希望의 礎石이다. 그리스도교적 希望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채 그리워하는 파란없이 지나온 幼年時代의 달콤한 옛추억의 찌거기가 아니다.
한편 充足感의 經驗은 人間의 審理構成의 根本要素 중의 하나이다.
그 자체로 놓고 보면, 이 경험은 「前宗敎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충족감의 경험은 克服되어야 한다. 克服ㄷ되어야 하되 이 첫 경험의 內容만은 肯定的으로 受諾할 수 있도록 克服되어야 한다. 여기에 失敗하였을 경우, 이 失敗는 인간에게 씻을 수 없는 깊은 心理的 傷處로 남게 마련이다.
「前宗敎的」 過去를 있는 그대로, 그러나 肯定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 과거가 현재라는 이 순간에 現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현재에 의해서 肯定되고 受諾될 때, 이 과거는 다시 將來를 위한 展望에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이 과거는 물을길 없는 회한의 응어리로 凝固될 염려도 없으며 將來를 위한 이러한 展望을 幼年期를 回想하는 退化的인 追憶과 簡單히 同一視 할 수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希望은 곧 다름아닌 回想」이라고 한 뽈 리꺼르(PAUL RICOEUR 現 빠리大學敎 哲學敎授)의 말은 意味深長하다 하겠다.
이말의 要旨는 이렇다. 人間이 기억을 하는데에는 두가지 方式이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기억을 하면서 自身속으로 오그라들어가 그속에 그대로 움추리고 주저앉아버리는 方式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물구나무 서서 걸어가는 식의 삶이요, 그 例를 우리는 프루스트의 作品에 나오는 一連의 에피소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른 또 하나의 方式은 플라톤의 回想說의 경우처럼, 自身을 自身 안에 가두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開放하면서 기억하는 方式이다.
이 경우, 過去는 亭樂感이나 罪責感 따위 强迫觀念처럼,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과거를 再發見하고 肯定하고 受諾하고, 또 倫理的 經驗일 경우는 이를 判斷하였기 때문에 이 과거는 오히려 스스로를 답답하게 억누르고 있던 뚜껑을 제쳐버리고, 후련하게 脫皮되어, 분명한 책임감을 갖고 玄室을 判斷하면서 우리의 希望에 參與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위에 引用한 뽈 리끼르이 말을 主語와 客語를 뒤집어서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回想은 곧 다름 아닌 希望』이라고 -
이 말은, 그리스도교적 希望이란 「장미公主」를 찾아 헤매는 「夢遊病」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이런 意味에서 原罪를 다루는 바오로 宗徒의 手法 即 둘째 아담에서 첫째 아담으로 소급해가는 그의 手法이나, 原罪 即 이 人類의 「過去」를 단번에 救贖史라는 커다란 文脈에서 다루고 있는 트렌토 公議會의 手法이나 모두 다 위에서 말한 둘째번 記憶方式과 흡사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P. RICOEUR FINITUDE ET CULPABILITE - 有限性과 罪責 - 빠리 1960 Ⅱ P.218-243 참조)
우리는 眞正한 의미의 그리스도교적 約束 期待 希望이 무엇인가를 소리 높이 웨쳐야 하고 우리가 대하는 各個 無信仰의 個人的 過去가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약속 기대 희망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우리의 지혜를 쥐어짜내고 우리의 뜨거운 사랑으로 그들의 가슴을 설레주어야 하고 덥혀주어야 한다. 그리고 心理學者들이 말하는 所謂 「現實法則」을 승인하고 우리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사막 한 가운데에서도 現實과 끊임없이 對決하며 絶對者, 우리의 하느님 우리의 救援을 찾아 처절한 死鬪를 벌이고 있는, 그러나 바위같은 信念으로 勝利를 確信하고 있는 우리의 信仰과 希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宗敎心理學의 用語를 빌리자면 우리는 여기에서 「總體性의 原理」와 「現實法則」 怏別과 斷絶의 原理를 승인하고 우리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된다. - 게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