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洞(명동)대성당과 나, 盧基南(노기남) 대주교에게 들어 본다
韓末(한말)·日帝(일제)·오늘을 지켜 본지 70년
受難(수난)·환희 송두리째 간직
문명의 효시·굴욕·건국의 산파역 등
오는 5월 29일, 金壽煥 대주교가 착좌하는 날 명동대성당은 준공 70주년을 맞이한다. 명동대성당은 1892년 당시 閔 대주교가 종현(鍾현) 언덕에 대지 5천평을 마련하고 건평 4천4백42평에다 대성당을 건설케하여 1898년에 준공되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명물인 서양식성당은 온장안의 구경꺼리였다. 나는 1930년에 명동 보좌신부로 취임하여 1967년 3월 27일에 은퇴했으니 내가 명동대성당을 지켜 온 햇수는 신부로서 12년 주교로서 25년 도합 37년이 된다. 그동안 나는 명동대성당과 함께 늙었고 허다한 파란곡절을 겪었다.
세계제2차 대전도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이미 지방의 모든 성당을 징용한 일본군은 드디어 명치정 1번지 명동대성당을 징용할려고 갖은 수단으로 얼러댔다. 그들은 서울의 명물인 「명동의 종소리」도 못 듣게 종을 떼라고 호통을 치고 종각을 잘라낼 것을 강요했다. 종각은 미국비행기의 목표물이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지막에 가서는 서슬이 퍼런 일본군 장교가 긴 칼을 빼어 책상위에 놓고 「예스」냐 「노」냐고 윽박지르며 대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엄포를 놓고 위협해도 「한국 가톨릭교회의 얼굴」이요, 「서울의 얼굴」인 명동대성당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성당을 징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일본군은 성당 주변의 느티나무 숲을 강점하여 말(馬)을 묶어 두는 곳으로 사용했다.
전세(戰勢)가 점점 불리해진 일본군은 남산에 굴을 파서 총독부서류를 감추고 시청서류는 지금 계성여자중고등학교 계단에서부터 성모병원 성모상있는 곳까지 「터널」을 파서 감추기로 결정했다. 나는 미친듯이 날뛰는 일본군에게 「터널」을 파되 성당 밑으로는 들어가지 말라고 간청했다. 이 「터널」이 거의 완성돼 갈 즈음에 해방되어 지금도 그 흔적이 있고 「터널」 입구는 막혀있지만 중간에는 공간으로 비어있다.
완전한 「고딕·스타일」로 모든 것을 하늘로 천주께 바치는 것을 상징하는 명동대성당은 그 건축과정도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명동대성당을 처음 설계한 高요한 신부는 공사를 시작해놓고 그만 사망해버렸다. 그래서 박위돌 신부가 부랴부랴 설계를 배워 1892년 8월 5일 정초식을 거행, 6년만에 준공시켰다. 처음 설계에는 성당내부의 기둥이 가느다란 대리석으로 돼있으나 돌을 구할 수 없어 벽돌로 기둥을 쌓아 올렸다.
그러나 시멘트가 없던 때이라 설계된 대리석 기둥만큼 가는 기둥을 흙과 회로 벽돌기둥을 쌓아올리니 자꾸 무너져서 할 수없이 설계보다 훨씬 굵은 오늘의 기능을 세우게 되었다.
약현(中林洞)성당에 이어 벽돌집으로서는 한국서 두번째로 낙성된 서양식건물인 명동대성당을 지은지 50년만에 첫 수리를 해보니 종보가 많아 못쓰게 되었고 나중에는 종추도 떨어졌다 지금은 기둥이 건물벽과 따로이 설계됐던 옛날과는 달라 종을 굴러치면 종각과 십자가가 흔들리는 것이 육안으로 보인다. 굴러치면 종소리는 은은 한 「명동의 재종소리」를 내지만 어른 서너명이 줄을 당겨야하고 집도 위험해서 굴러치지 않는다.
지금의 종은 옛날의 종이 아니다. 옛날의 종은 종추가 떨어졌을때 종직이가 「함마」로 치는 바람에 금이가서 불란서로 보내고 새 종을 들여온 것이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모현대로 만든 種이지만 종소리가 옛날만 못하다.
명동대성당의 「파이프·오르간」은 1918년 민 대주교의 은경축을 기념하여 그 당시 돈으로 2만원을 들여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사들인 것이다.
8·15해방이 된 후 특히 인상깊었던 일은 그해 9월 26일 복자축일날을 맞이하여 명동대성당에서 미군환영 대미사를 집전하고 성당광장에 가설무대를 설치하여 환영회를 베풀었을 때이다.
영어를 모르는 나의 통역은 장면박사가 맡아주었다.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린 미군들은 신앙열이 대단했고, 미군장병들이 새파랗게 젊은 한국인주교에게 친구(親口)하는 모습들을 보고 『미국에는 천주교가 없다』는 풍설이 가셔지기 시작했으며, 종과 국가를 초월한 보편된 교회를 실증했다.
하지 중장은 한국에 들어오자 그 이튿날 나를 만나고 『한국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가톨릭교회 주교인 당신뿐』이라고 하면서 협조를 요청했으며 그 후도 자주 만나 이승만 박사를 지도자로 천거했다.
그래서 이 박사는 장 박사와 정적(政敵)이 되기까지 가톨릭교회를 옹호했다.
그해 12월 8일에는 김규식·김구 등 한국 임시정부 요인 환영 대미사를 명동대성당에서 집전하고 현 문화관에서 연회도 베풀었다. 이 문화관은 건국初의 민주의회로 혹은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던 정당(政黨)들의 집회소가 되었고, 따라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정치 지도자들의 인상도 좋아져 교회가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나는 『나라가 잘돼야 교회가 잘 된다』는 신념아래 장면 박사를 정계에 투신시켰다. 이때부터 장 박사를 일반 신자들이 「장 주교」라고 부를 만큼 나와의 관계가 깊어졌다.
병인년 순교자들의 시복이 확정된 지금 내가 크게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6.25때 성당 뒷 뜰에 안치해둔 순교자 유해를 괴뢰군들이 깨뜨리고 파헤쳐 그중 한두분의 것이 뒤섞여 버린 것을 구분해서 모시지 못하는 것이다.
文責 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