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RNS】 교황 바오로 6세가 성 베드루와 바오로 치명 1천9백주년 기념일인 지난 6월 29일을 「신앙의 해」의 시작으로 선포함에 따라 자연히 일어난 질문은 『성 베드루의 유해가 어디에 있나?』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수고를 들인 정확한 과학적 조사에 의한 대답은 「성 베드루」대성당안에 있는 「화부리까 디 삐에트로」 보관소의 한 방에 성 베드루의 유해임이 틀림없으리라는 뼈들이 안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뼈들은 「플렉시글라스」로 포장되어 목록에 올려져 확정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베드루가 네로 황제의 박해로 치명한 후 그 뼈가 「플렉시글라스」에 포장되어 나타날 때까지 적어도 세번 쉴곳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보통 묘소에 시체가 무명천으로 싸서 안치됐고 다음 콘스탄틴노플 대제 시대에는 본래의 묘소 근처에 장엄한 남색과 황금색 천으로 싸서 대리석관에 안치됐다. 세번째는 「성 베드루」대성당 주보성인의 이 세상 유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을 어떤 직공에 의해 동 대성당 밑 동굴에 있는 보관상자에 옮겨져 1940-49년까지 안장됐다.
성 베드루의 유해에 관한 우수한 전문가인 「로마」대학의 마르가리따 과르둑치 교수는 『바티깐 대성전 고해소 밑에 있는 성 베드루의 유해』라는 제목의 책을 새로 발간했다.
이 책은 진정한 베드루의 유해를 발견했다는 그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놀라울만큼 많은 역사적 과학적 시험으로 분명하게 해놓았다. 가톨릭신자들은 그들의 첫 교황은 성 베드루 대성당 높은 제대 밑에 묻혀있다고 항상 믿고 있지만 1940-49년까지 성 베드루의 유해를 찾던 한 교황위원회는 동 대성당 동굴 밑 땅속에서 묘소를 발견하고 그것이 베드루 사도의 묘인 것을 증명했다. 이 묘소는 완전히 비어있고 거의 파괴되었다.
이 근처에서 몇개의 뼈가 발견됐는데 조사에 의해서 그것은 한 여인과 두 청년의 뼈임이 판명되고 베드루의 유해는 아니었다.
1953년 「로마」대학에서 희랍비명(碑銘)을 가르치던 과르둑치 교수는 성 베드루를 처음으로 안장한 묘비의 각명(刻銘)을 연구하게 됐는데 이 묘비는 3세기와 4세기 초의 것으로 동 묘지 위에 성당을 짓고 두번째로 더 큰 묘비를 세우기 전의 것이다. 이 묘비 위에 열심한 순례자들이 새긴 베드루 및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이름 그리고 경건한 기도문을 발견하고 연구하다가 묘비의 벽이 움푹 파진 곳을 보았는데 5개의 흰 대리석판이 깔려있고 길기 77㎝ 폭29㎝ 높이 31㎝의 마치 뚜껑없는 상자나 항아리같고 속은 비어있었다. 과르둑치 교수는 의아해서 곁에 서있는 직공에게 무엇이 들어있었느냐고 물어보아 몇년전 「성 베드로 화부리까」의 책임자인 카스 몬시뇰의 명령으로 이 단지 속의 인물이 나무상자로 옮겨져 동굴 보관실에 가져가게된 사실을 알게됐다. 과르둑치 교수는 각종 인류학자, 화학자 지리물리학자들이 나무상자를 열고 내용을 조사할 허가를 얻어 그들의 연구결과를 종합하여 비로서 성 베드루의 유해라는 것이 판명되어 동 성인의 유해는 지금 성 베드루 대성당 밑 동굴 속에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