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아 司牧(사목) · 敎理硏究(교리연구)」 參席記(참석기) - 福音說敎(복음설교) 前段階(전단계)의 對話(대화)와 成人豫備者(성인예비자)
豫備者(예비자)의 精神的(정신적) 變革(변혁)이 先行(선행)돼야
그들 思考(사고) · 生活(생활) 硏究(연구)코
日常事(일상사)서 對話(대화) 시작
福音傳達(복음전달) 學習指導(학습지도) · 知識傳達(지식전달) 아니다
한국 産業(산업) 文明(문명) 奔流(분류)가
播種(파종)에는 沃土(옥토) · 適時(적시) · 氣條(기조)가 條件(조건)
神(신)에게의 關心(관심) 빼앗아
복음설교(교리교수) 전단계의 대화문제는 근년에 맣이 연구되고 논의되어 온 주제이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교부들도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AD GENTES, NO. 11-12) 또 수많은 서적과 논문이 이 문제를 다루어 왔다.
따라서 지난번에 「마닐라」에서 개최된 「아시아 사목 교리연구주간」에 이것이 중요한 주제의 하나로 거론(擧論)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 복음설교의 전단계 대화란 무엇인가?
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의 연장(延長)(=몸)으로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참으로 광범위한 활동을 한다. 신자들의 능동적인 애덕에 의해서 교회는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 및 역사(役事)의 표징이 되고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된다(마테오 5장 13 · 14절)
교회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이를 듣는 이들로 하여금 신앙을 받아들이고 고백하도록 준비를 시키어 세례를 받게 하고, 그들을 오류의 노예 상태에서 구해 내어 그리스도 안에 합체(合體)시킴으로써 그들이 애덕을 통해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년(成年)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LUMEN GENTIUM, NO.17)
교회는 이와같이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할 사명을 받았지만 아직 모든 이가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려고는 하지 않고 있으며, 이미 교회에 나오고 있는 이들, 혹으 나오고자 하는 이들 가운데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많다.
실상 종교의 참된 목적, 더우기 그리스도교의 참된 목적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그것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종교적 감정을 갖게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진지한 구도자(求道者)들을 돕고 고무하여 그들의 영성(靈性)을 심화시키고 또한 순화시키기 위해서는, 기본적 「케리그마」 (복음선포)에 앞서 어떤 특별한 대화를 하거나 혹은 특별한 준비를 시킬 필요가 있다.
훌륭한 농부는 씨를 뿌리기 전에 땅을 가꾼다. 먼저 밭을 갈고 거름을 주어 땅을 비옥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일기(日氣)를 살피어, 잘 자라서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적시(適時)에만 씨를 뿌린다 신부와 수녀와 교리교사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의 씨를 뿌리는 책임을 지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굳게 뿌리를 박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훌륭한 농부같이 먼저 땅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의 마음을 깊이 연구하고 합당한 준비를 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의 한국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에 압박을 가하는 산업문명의 분류(奔流)로 말미암아 인간과 현세의 사물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는 반면 그만큼 신(神)에 대한 관심은 식어가고 있다. 오직 인간의 참된 실재성(實在性)에 관한 참을성 있고 신뢰에 찬 대화(對話)만이 현대 한국인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청춘남녀들의 경우 그렇고, 또한 어떤 교리지도에도 흥미를 갖지않는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도 그렇다. 그들은 자기들의 중요한 환경과 입장, 매일의 관심사, 예컨대 교우(交友)관계, 사랑, 여가(餘暇)문제, 사회적 포부 등에 관한 대화를 원한다.
사도직의 경험에 비추어 참된 귀의(歸依)와 형식주의적이 아닌 진실한 신앙과 그리고 뿌리깊은 완전한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태도)를 바로잡고, 인간적 포부의 폭을 넓히고 정화싴며, 또한 인간 상호관계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사목자가 그 예비자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가장 많이 배려(配慮)해야 할 점은 그 귀의의 동기를 깊게하고 정화시키는 일이다. 복음 전도에 있어서 참으로 효과를 거두려면 먼저 그 복음말씀의 주제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예비자들의 신관(神觀)뿐 아니라 인간관과 세계관(현세관)도 바구게 하고, 또한 그들의 의지와 포부와 욕망의 역본주의(力本主義)를 정화시킬 것을 목적하지 않으면 안된다. 복음 설교 전의 이 대화단계에 있어서 교회의 언어와 견해는 사람들 자신의 일상적 언어로 그들의 생활에 접근하여, 그들의 경험 및 가치관과 대결한다.
따라서 이 단계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직접 명백하게 전하는 단계와는 다르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의 처지 및 입장을 깊이 연구, 숙고하고 동시에 그 영혼과 마음을 정당하게 단판하는 단계이다. 「복음 설교 전단계의 대화」는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예비지도 - 개인적 접촉대화
포교사업은 일반적 학습 지도나 단순한 지식 전달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포교적 교리 교수는 바로 귀의(歸依)를 위한 사업으로서 전적(全的(으로 예비자들을 훌륭한 그리스도 신자로 육성하는데 진력해야 한다. 그 수행되어야 할 과업 즉 외교인(불신자)을 내적으로 완전히 변혁(變革)시키어 크리스챤 생활로 인도하는 과업은 교훈적 과업이기 보다 심리적 과업이다. 오늘의 한국에서는 그리스도교에 관해 무엇인가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두, 비록 그들이 신앙에 대하여 조금밖에 모르거나 혹은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덮어놓고 「예비신자」 명단에 올리는 것이 유행적 경향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아직 생소하거나 혹은 전혀 모르는 초심자들이 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위한 아무런 소양도 갖추지 못하고 흔히 교리문답 시간에 참석하고 있다.
교리교수는 처음부터 너무 지나치게 그리스도교적이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은 비(非)그리스도교적인 청강자들의 시점(視点)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적으로 말하면 무엇보다 먼저 대화를 해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찾은 그 구도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이 왜 우리에게 왔는가를 배우고 또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제일 흔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 이와 같이 진지하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우리는 성신의 도움을 식별하고 또 진보에 유익한 것과 방해가 되는 것을 분간하여 그 구도자를 보다 참된 길로 이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방문자를 돠와서, 다른 사람들과 또한 하느님과 일치하는 그의 진보를 제약하거나 혹은 방해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그 스스로 죽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져야 한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의 끝장을 내든지 혹은 하느님의 은총에 달라붙든지 하여, 보다 적나라(赤裸裸)하게 자기를 털어놓아야 한다. 본래 진보를 제약하고 방해하는 것들은 생활 혹은 말로써 실존적으로 증명된 복음의 빛에 비추일 때 그 정체가 드러난ㄷ.
만일 그가 하느님과는 반대되는 것에 대하여 이러한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또 자기의 취약성(脆弱性)을 의식하여 기꺼이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바로 하느님에의 완젆나 귀의가 된다. 이때 그는 이전에 자기의 가치관으로 선하게 보아온 모든 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화되어 그리스도 안에 「보람된 성취(成就)」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아시아 사목 교리 연구 주간」에 참석한 이들은 이 개인적 대화의 단계에서 다루어야 할 몇가지 기본 「테마」를 제안했다.
즉 인격의 신비, 미래에 대한 「비존」 그리스도교적 희망에서 비롯하는 것, 그리고 사랑, 자유 같은 개인적인 의미를 갖는 것들과, 가정, 사회 같은 공동적인 의미를 갖는 것들이 그것이다.
요컨대 복음 설교(교리교수) 전단계의 대화는 인간의 구상적(具象的) 생활에 관한 대와이어야 하며, 특별히 신관(神觀)과 인간관을 확대시키고 정화시키며 개인의 양심을 깨우쳐 주려고 해야한다.
이 대화는 인간생활의 모든 부면이 또 하나의 세계 즉 모든 것이 속속들이 비추어지고 판단되고 일신(一新)되고 통합되는 그리스도의 세계와 어떻게 접촉되어 있는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대화의 상대자를 그의 주위 환경과 경력 그가 받아온 감화와 스스로 다짐해 온 결심 등이 형성한 현재이 상태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그의 영적양심(靈的良心)을 깨우쳐 나갈 수 있다.
그럼으로써 점차로 그를 도와서 자아(自我)의 보다 큰 선물을 얻으려는 결심 즉 자기 마음을 더욱 너그럽게 개방하려는 결심을 하게하고 보다 위대하고 보다 고상한 어떤 것을 동경케 할 수 있을 것이다. - (계속) -
조요한(메리놀회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