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수단을 기념하기 위하여 특별히 제정된 날을 맞이하면서 나는 친애하는 자녀들과 형제들 그리고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이날을 함께 경축하자고 호소하는 바입니다. 이 홍보수단 부면에 있어서 바로 눈앞에 전개되는 발전의 의의를 통찰하고 거기서 오는 우리 각 사람의 엄숙한 책임을 깊이 느끼도록 여러분을 도와드리고자 합니다. 최근까지만 하여도 많은 사람들이 학교나 가정에서 배우고 주위에서 들음으로써 얻게 되는 희미한 기억외에는 아무런 자극제도 가지지 못하였읍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관심을 자극하는 신문·잡지·라디오·텔레비 등이 메아리쳐 울려퍼지고 우리 앞에는 새로운 시야가 넓게 열렸으며 우리는 생명이 약동하는 이 세계에 우리 자신을 적응시키고 있읍니다. 이같은 발전을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읍니까? 여기 인류전체를 발전 향상에로 이끌어주는 섭리의 길이 보입니다. 이런 기술을 바로 지배할 줄만 안다면, 우리는 온갖 희망에 넘칠 것이지만 만일 자기책임을 망각한다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신문·잡지·라디오·텔레비 등이 과연 실제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읍니까? 나는 모든 가톨릭 자녀들에게 진지하게 이것을 묻고 싶습니다. 우선 발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물론 경제적 발전도 사회적 발전도 함께 생각하는 것 분명합니다. 이미 「민족들의 발전」(인류의 발전)이란 회칙에서 언급한 것을 다시 강조하는 바이지만, 『진보가 올바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전체와 인류 전체의 발전상인 전체적인 것이라야 합니다.』(14조)
이같은 홍보수단이 사람들을 자아만족이나 실망에 빠뜨림이 없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 생활양식의 가치와 결점을 바로 평가하도록 도와주는 참된 빛이 될 수 없다면 홍보수단이 세계에 대하여 참신한「비젼」을 마련해 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만족도 유익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이참신한 「비젼」은 감정을 초월해서 기분이야 맞든 안맞든 이웃문명이 지니고 있는 참된 가치를 발견하는 데에 도움이되고 각기 자기 사명을 자각하고 이웃과의 형제적 협력으로 그 사명을 다하도록 도와주며 마침 내 『절대자이신 하느님께로 향한 휴머니즘이 아니고서는 참된 휴머니즘이 달리 있을 수 없다』(42조)는 진리를 깨우쳐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매일같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얘기와 논설과 개념들이 과연 이러한 자각과 밝은 전망을 보여주고 있읍니까? 신문 잡지 라디오 영화 텔레비 등을 통하여 아낌없이 이웃에 봉사하려는 모든 홍보담당자들에게 나는 이것을 묻고 싶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자만심이나 옹졸한 민족주의를 길러주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또 한편, 어떤 국가나 정당한 자존심을 가지고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물질과 지식과 재능을 발굴하여 그것을 최대한 향유함으로써 전인류 공동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일입니다.
계속적인 불화와 비협조적인이며 파괴적인 비판 정신을 조장하거나 폭력적인 혁명이 온갖 질병과 불의를 제거하리라는 망상을 길러주는 것도 잘못이지만, 이 비참한 현실에 대하여 책임있는 사람들을 깨우쳐줌으로써, 비난의 아우성소리를 억제하고, 『현실을 근본적으로 혁신할 수 있는 변화를 대담하게 일으키며, 긴박한 쇄신을 요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체없이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32조)는 확신을 주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한일 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필요 불가결의 식량, 지식, 영신적 빛도 부족한 지역에 있어서, 홍보수단을 그릇 사용하여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심을 북돋아 주고, 이미 마음껏 만족을 누리고 있는 소비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새로운 요구를 불러일으키며 헛되고 덧없는 오락 을 격증시켜 향락에도 취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큰 잘못입니다. 일단 이런 유혹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그 앞에는 위대한 과업들이 나타날 것 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호소를 대변하고 평화를 위한 협력과 자발적 사업과 투쟁을 대담하게 도와줄 수 있으며 따라서 건전하고 유익한 경쟁도 자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 세계가 당면한 격동 속에서 『개인이나 전 인류가 인간답지 못한 생활조건에서 보다 인간다운 조건으로 넘어가는 참된 진보를』(20조) 촉진하는데 홍보수단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읍니까?
그리스도 신자들은 신자로서 다른 사람과 자신을 결합시켜주는 이 형제애야 말로 다같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데에 그 근원이 있음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은 온갖 최고 가치의 원천이시며 최종 목표로서 이것들을 보증해 주십니다. 모든 사람 특히 가톨릭 자녀들에게 요청하는 바는 홍보수단으로서 온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며 아직도 암흑 속에서 구원의 빛을 찾고 있는 이 세계를 향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구세주 그리스도의』(___ 5) 복음을 지붕위에서(마테오 10·27) 소리높이 전파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홍보수단은 인류발전에 필요불가결의 공헌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발전이야 말로 모든 선의의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진심으로 희망하는 바이며 우리의 모든 노력을 다해서 쟁취하려는 목표인 것입니다.
미래는 바로 여기 있읍니다. 보다 완전한 정의를 요구하는 민족들의 끊임없는 부르짖음과 평화를 위한 투쟁 그리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보다 고상한 생활을 희구하는 그들의 갈망속에 우리의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보다 고상한 생활,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줄 수 있고 또 주고자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같은 미래를 건설하자고 여러분에게 호소하는 바입니다. 이런 희망을 품고 나는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축복을 보내는 바 입니다.
「바티깐」에서 1968년 5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