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천주교회는 중국을 거쳐 들어왔기 때문에 16세기 이후에 이미 중국 땅에서 전교하던 구라파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바가 그대로 한국에 전해져서 제사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아직도 이단시하고 엄격한 제한을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중세기 중국에서 전교하던 구라파 출신 성직자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보고 듣고 실행해오던 구라파의 크리스챤적 풍속과는 아주 다른 동양의 제사와 초상때의 예가 저들의 것과 아주 다른 이단적인 것으로 보였고 생각된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선교사들은 이 문제에 대해 크게 논쟁을 벌였었다.
제사가 선조에 대한 효도에서 하는 행위이니 『미신이 아니라』느니 『미신이라』느니 등으로 쟁론하는 한편 교황성부께 상소하여 그들 주장을 이해시키려고만 노력했었다.
이와 같은 동양의 미풍양속을 이해치 못한 선교사들의 생각은 한국에도 꼭 같이 적용되어 1790년 5월에 윤바오로(유일)와 우요한이 북경에 들어가 신부 파견을 요청한 후 제사문제에 대해서 문의했을 때도 엄금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지시를 받고 돌아와 조상제사를 폐지하게 되어 1791년 전라도 신산군에서 윤지충(바오로)이 선조의 신주를 모시지 않게 되어 그것이 동기가 되어 한국교회 최초의 큰 박해인 신유교난(1801년)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의 신부들이 매우 엄하게 이 문제를 가르쳐서 제사에는 일체 참예치 못하게 됐으며 제사를 차리기 위한 준비까지 돕지도 못한다고 가르쳤다.
예컨데 제사를 차리기 위한 준비로 떡방아를 찧거나 술을 걸르기 위해서 채를 외교인에게 빌려주는 것 까지도 크게 잘못하는 일로 가르쳤다.
살아계신 아버지 진지상에 올려놓을 고기반찬 꺼리는 장을 보아다 주더라도 좋지만 죽은 아버지 제삿장 심부름은 못한다고 가르쳤다.
그로인해서 이조의 앞뒤가 막힌 사대주의와 쇄국정치의 정신을 가진 딱딱한 선비들과 쇠꼬챙이 같은 선교사들의 이해와 지식부족의 두 뻣뻣한 막대기가 부딪쳐 백여년의 기나긴 박해사를 이루어 2만이 훨씬 넘는 순교자를 냈으며 한국 천주교 발전에 크게 지장을 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사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전교를 하던 외국인 선교사에게도 서서히 의문이 생기게 되었으니 1천7백년대에 북경서 전교하던 안다(安多·토마스 안또니) 신부와 장성(張誠) 신부가 순수한 미신으로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당시의 중국인 강희제(康熙帝)에게 질문 한바 『공자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를 인간의 모범으로 존경함이며 선조에 대한 제사는 효도의 예로서 행함이 목적이며 결코 복을 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그들의 생각과 태도가 달라지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후 교황청에서도 서서히 이 문제에 대해서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금규(禁規)의 완화는 방인신부가 배출되기 시작한 극히 최근의 일이다.
①1936년 5월 26일 포교성성에서 일본에 내린 훈령 「일본」에서의 조국에 대한 「가톨릭신자의 의무」는 정부가 지시하는 정신이 순수 미신적인데 동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서 신사 참배를 해도 가하다는 해석을 내려준 것은 크게 동양을 이해해준 교황청의 첫 태도라 하겠다.
②1939년 12월 8일 포교성성으로 부터 중국신자들에게 내린 「중국풍속에 대한 예식과 서원에 대한 가르침」이란 훈령은 제사에 대한 어느 정도 너그러운 태도의 가르침이었다.
즉 공자에 대한 예식이나 죽은 사람에 대한 제사에 있어서 신자들이 행할 수 있는 한계를 제시해 주었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모든 제례에 참여할 수 있다.
㉡단순한 능동성을 가질 때에도 참여할 수 있는 때가 있다.
천주교를 배교하는 행위라고 보지 않고 예의상으로 하는 줄 알게 될 경우에는 어느 정도 능동적으로 할 수 있다.
예컨데 시장이나 군수가 신자인 경우 합동전사자 추도식에 제관이 되어야 할 경우에는 자신이 나서서 모든 예식을 행할 수 있다.
㉢무식한 사람이 많이 모인 데서의 제사에 참여할 경우 같으면 자기의 행동이 배교의 행위가 아니요 단지 예의상으로 참예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서 오해를 받지 않게 하라.
㉣신자들은 외교인들의 제례에 예의상으로 참여하여 그들의 풍속과 지나친 마찰을 피하도록 하되 서서히 더 완전하며 고상한 예식인 우리교회의 제사인 위령미사와 위령기도로써 망령을 위해 올바른 도움을 드리는 예식을 인식시키게 하라는 내용의 가르침이었다. (계속)
李鍾昌(경남 남해본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