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論(무신론)과 對決(대결)키 위한 하나의 神學(신학) ⑧ 五, 敎會(교회)의 救世宣敎(구세선교)를 위한 素描(소묘) (續)
敎會救世活動(교회구세활동)을 위한 原則論的(원칙론적) 假說(가설)로서
苦痛(고통) · 죽음 거쳐야 自己完成(자기완성) 可期(가기)
그리스도 가장 完全(완전)한 人間(인간) 典型(전형)
宇宙(우주)의 人間化(인간화) · 征服(정복)은 神(신)으로부터 받은 人間使命(인간사명)
現代人(현대인)의 人間自律性(인간자율성) 意識(의식)과 「神(신)의 모상대로 창조된 人間(인간)」
神(신)·人間(인간)의 調和(조화)를 示唆(시사)
발행일1967-07-23 [제578호, 4면]
이 셋째번 命題는 筆者가 「휴매니즘」 및 「世俗化」라고 일럿던 無信仰의 첫 두 動機에 該當하는 것이다. 이 命題에서 우리가 特別히 强調해야 할 것은 아버지요 宇宙萬物의 創造主이신 하느님께 관한 聖書의 中心思想이다. 하느님은 人間을 당신 模像대로 創造하셨다.
■ 인간을 神의 模像으로 創造하는 하느님
그러기에 創造는 또한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自己 手交요 전달이다. 하느님은 人間을 당신 모상대로 創造하였다는 이 創世記의 귀절은 제2차 바티깐 公議會의 「現代世界에서 매우 重要한 자리를 지지하고 있거니와 이 귀절은 여러가지 뜻 중에서 다음과 같은 뜻도 포함하고 있다.
即 하느님은 人間을 創造하여 宇宙를 征服하고 支配하는 被造物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람을 우리의 模像대로 만들어 그로 하여금 하늘의 새들…을 支配하게 하자』는 말은 곧 人間으로 하여금 被造物을 지배하게 하자』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宇宙를 征服하고 歸順시켜야 한다는 人間의 召命은 바로 聖書的人間學의 核心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宇宙를 變形하여야 하는 人間의 責任과 自律性은 바로 啓示의 核心에 이와같이 버젓하게 肯定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人間은 하느님의 종이어야 하고 그 형제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아낌없는 奉仕를 제공하여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고통과 죽음을 甘受하여야 하고 宇宙支配에의 召命이라는 그의 運命안에 분명히 計上되어 있는 이 모든 受動的與件(PASSIVITES)을 受諾하여야 한다.
바로 여기에도 메씨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델이요 모범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새 아담이신 그이는 스스로 야훼의 受難의종이 되어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順命하셨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이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현양을 받으셨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하신 예수 살이되시고 영화로히 현양받은 「말씀」의 이 人性이야말로 人間의 가장 완전한 典型이다. 그런데 영광중에 현양된 말씀의 人性이신 그리스도에겐 지울 수 없는 십자가의 五傷이 - 榮光의 상흔처럼 - 새겨져 있지 않은가! 이것은 곧 人間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야훼의 受難의 종처럼 고통과 죽음을 거쳐서야만 自己完成을 可期할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여기에서 受難 - 죽음 - 부활이라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또한 가장 核心的인 그리스도교 敎義와 思想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想起할 필요가 있을까? 하느님의 종이 영광중에 들어 높임을 받은 것은 그의 順命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순명하는 가운데, 순명에 의해서만 그는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이다.
동시에 「世俗化」라는 테마도 여기에서 그 균형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宇宙와 對座하고 있는 人間은 이 宇宙를 좀더 人間化하고 人間에게 좀더 이바지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使命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世俗化」와 「神聖化」라는 似而非 對當關係를 克服한 셈이다.
世界를 그리스도교 精神으로 生氣있게 한다는 것은, 반드시 中世社會에서만 볼 수 있었던 特殊한 그리스도교文明을 導入하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특수한 중세적 그리스도교 文明에서도 그 時代를 초월하는 恒久的인 要素들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굳이 否認하려 든다면 이것은 그리 正直한 態度가 못될 것이다.
人間이 神의 模像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人間의 自由와 責任을 벌써 충분히 保障하고있다. 人間의 自律性은 現代人의 自意識의 本質을 이루고 있다. 이 自律性 自體內에 그리고 이 自律性을 死守하려는 現代人의 온갖 試圖에는 프로메테우스的 反抗의 誘惑이 한순간도 쉴새없이 그 魔手를 뻗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또한 人間이 神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聖書的 創造說의 빛을 따라 神과 人間의 調和를 可期할 수 있는 길이 들어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는 現代人의 모델이다(우르스 폰 발타사르 「神과 現代人」 P. 244-262 참조)
■ 하느님의 말씀
위에서 여러번 引用한 바 있던 뽈 리껴르 敎授는 悔罪에 關係되는 宗敎文學, 例컨대 舊約성서의 참悔聖영 따위가 어떻게 우리가 준수해야 할 法, 따라야 할 모델, 우리에게 生命을 주는 約束을 具現하는 「말씀」으로 나타나는 가를 잘 보여주었다.
이 말씀이야말로 주저앉아 있는 人間으로 하여금 자리를 떨고 일어서게 하는 催告요, 煽動이요, 督促이다. 그뿐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은 幼年期에 대한 우리의 동경과 訣別하도록 우리를 도발하는 要素로 나타난다. 이 말씀은 또한 審判하고, 善과 惡이 무엇이라고 하면서 法을 선포하며 우리에게 生命을 주는 말쓰이다. 프로이드는 聖書本文을 오랫동안 연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이 깊은 次元을 알아듣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이 하느님의 말씀은 神과 人間의 對座를 實現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位格的 性格을 밝혀준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