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바오로 6세 성하는 5월 1일 「성요셉 노동자 수호자의 날」을 맞이하여 『노동자에게 충분한 생활보장을 해주라』고 말하면서 『이론적으로는 쉽게 반응을 보이면서 실천면에서는 어처구니없이 냉담하다』 고 오늘의 사회 현실을 개탄하였다. 이것은 봉급생활을 하는 전인류에게 보내지는 최대의 선물이고 우리 가톨릭교회에 보내지는 지상의 명령이기도 하다. 지난번 강화도에서 일어난 가톨릭노동자들의 고용거부사건을 한국주교단에서 중대시하고 사회정의에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도 이러한 면에서 일반사회의 절대적인 호응을 받았고 「바티깐」 당국에서 한국주교단에 치하하는 「메시지」를 보내오기까지 했다.
이런 시점에 서서 우리는 교회 내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어떤 특수기관에서는 도리어 일반사회의 임금보다 많은 액수를 지급하는 곳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기관에서 봉급생활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감히 발설하기조차 낮이 뜨거워지는 최저임금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천주를 위해 모든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는 말은 오늘의 현실사회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포교 방법임을 교회 당국에서는 이미 깨달은지 오래이다.
그래서 『굶어죽을 처지에 있는 사람이 빵을 훔쳐 먹어도 죄되지 않는다』는 해석이 나온 것이다.
어떤 교회기관에서는 사환에게 주는 봉급이 2천5백원이다. 서울의 도심지에서 2천5백원의 봉급을 타는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노동력의 착취라고 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다.
10년이상 간부직에 있는 사람의 봉급이 1만5천원 이라면 대부분은 믿으려들지 않는다. 그만치 서울의 생활비는 많이 든다.
가장 대우가 박하다고 하던 공무원봉급도 2·3년 내로 인상을 거듭하여 과장급이면 3만원을 상회하게 되었다.
공무원의 봉급인상 조처에 따라 서울대교구청에서도 1월에 3할, 4월에 다시 3할 인상되어 임금 실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일부 기관에서는 이런 문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싫으면 그만두라』는 식의 태도로 나오고 있는 것은 바로 노동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노동자의 축일에 바오로 6세가 지적한 현실 바로 그것이 아닌가 한다.
역시 문화사업을 하고 있는 어느 기관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강사료를 시간당 3백원 지불하고 있다. 일반 사회에서 지불하고 있는 강사료의 3분의1에도 미치지 못하는 액수다.
강화도 사건이 표면화한 이면에 JOC의 숨은 공로자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본보를 통해서 충분히 알려졌다. 그런데 내부적인 일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도 커다란 모순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어떤 업체에 관여하려다가 상부기관의 압력을 받고 부득이 하게 후퇴하였다는 말이 있다. 정의를 위한 싸움에 압력을 받고 물러섰다는 말은 JOC의 본래 사명을 잊은 처사이다.
이러한 역조현상이 씻어 지지 않는한 교회의 정상적인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대우문제는 시골본당일수록 더욱 심각하다. 무보수가 있는가 하면 최하 2천원에서 5천원 내지 7천원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러나 몇 교구에서 근년에 들어 봉급규정을 제정했으나 그것도 겨우 8천원에서 1만6천원(주로 대학졸업자) 선이니 공무원의 말단직 봉급과 비등할 뿐이다.
이런 대우로는 사회 인사와 대등한 위치에서 복음을 전하기란 힘들다.
이같은 현상은 재원이 제일 큰 원인이고 교회당국의 속수무책 혹은 무관심이다. 전국 375개 본당중 본당신부 식생활과 본당운영 자활가능본당은 전체의 3분의1이하임은 분명하다. 이런 사정에서 봉급인상은 신자 각 개인의 책임이요 보다는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또 다른 중대한 문제는 노동조건과 교회기관 피고용자의 인격적대우이다. 우리나라 어느 사회에서도 볼 수 없는 전근대적 상태아래 억눌려 있다. 일꾼이 아니라 하인이다. 한마디로 이론과 실천간의 간격이 어느 곳에 비할 수 없을 만치 등 벌어진 사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