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日(일) 弘報(홍보)의 날 座談會(좌담회)
韓國(한국)의 健全(건전) 言論(언론) 위한 省察(성찰)
原理(원리) 缺如(결여)·價值觀(가치관) 未定(미정)
混亂(혼란) 脫皮(탈피)못해·韓國(한국) 現實(현실)에 批判(비판)은 建設(건설)
姿勢確立(자세확립)·人材養成(인재양성)코 影響力(영향력)을
教會(교회) 積極的(적극적) 寄與(기여) 時急(시급)
▲日時…5月 15日 10時
▲場所…가톨릭學生舘
▲참석자
(無順, 敬稱略)
崔錫采(조선일보주필, 한국신문편집인 협회장)
王學洙(고려대교수, 한국잡지윤리위원회 위원장)
李元敎(본사논설위원,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
金南洙(신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국장)
■ 사회
具常(시인·본사논설위원)
본사에서는 「홍보의 날」 기념특집의 하나로 지난 15일 오전 10시 부터 서울大學文理大 건너편 서울 가톨릭 학생회관 응접실에서 다음과 같은 언론계 관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약2시간동안 「오늘의 한국 언론을 성찰」하는 좌담회를 가졌었다.
이날 참석한 인사들은 신자나 비신자를 막론하고 오늘의 언론에 있어 그 「푸린시풀」이나 가치관의 미확립과 혼란을 지적 개탄하고 가톨릭의 이런 원리면의 사명을 강조하였다.
이 좌담회서 논의한 것은-적어도 교회입장에서는-어디까지나 원리 문제다. 衆意는 한결 같이 가톨릭의 훌륭한 「푸린시풀」의 기여를 바라고 있다. 한국교회의 힘이 이에 자랄 수 있을까? 【編輯者註』
具=너무나 熟親한 사이들이 되어 이제부터의 공식좌담이 잘 진행 될지 의문이군요.(일동 웃음) 그러나 이제부터의 화제도 아까 말씀처럼 주제에 구애됨이 없이 평소 언론계를 직간접으로 지도하시고 또는 종사하시면서 느끼신 바를 기탄없이 토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오늘 좌담회의 意義를 선명케 하기위하여 金 신부님으로 부터 가톨릭의 언론관이랄까 또는 「매스·메디아」에 대한 교령의 취지에 대하여 말씀을 들려 주십시요.
金=흔이 생각하기에는 오늘날 「매스·메디아」가 비상하게 발달했으니까 가톨릭교회도 그것을 포교에 적극적으로 이용하자고 나서는 줄 그렇게 지금까지 신자들마저 이해하고 있읍니다만 지금 교회가 요청하고 주장하는 자세는 그런게 아닙니다.
물론 그런 功利性도 일부분은 되겠지만 그보다도 「매스·메디아」가 지금 인류에게 주는 영향력은 지대한 것으로 그 자체를 인류발전에 이바지 하도록 이끌어 나가자는 것이 「바티깐」의 교령이나 교회의 변함없는 생각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모든 善意의 언론인들, 즉 「매스·메디아」의 담당 또는 종사자들이 바른 정신을 가지고 일치단결해서 인류의 참된 행복과 그 향상에 모든 목표와 방법을 집중시켜 준다면 교회는 아마 그것으로 자기사명을 다한 것이 될 것이며 만족할 것입니다.
具=그러면 「매스·메디아」에 관한 교령에 제기된 여러 문제중에서 먼저 윤리惡에 대한 것으로 우리의 언론에 나타나는 肯定과 否定의 불균형, 富와 貧의 불균형, 善과 惡의 불균형 등을 들 수 있는데 첫째 언론의 논조면에서의 이런면을 崔 주필께서…
崔=일반적으로 한국의 언론이 긍정적면을 거론치 않고 보다 부정적 이다 하는 이야기를 듣는데 이것은 첫째는 언론의 본질적 屬性이 理想을 제시하고 현실을 비판하는데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 사회 현실면이 너무나 어둡고 괴롭고 부패해 있기 때문에 그 사회의 거울인 언론에 그대로 반영되는 까닭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의 언론이 부정적인데 치우친다는 일반 通念에 찬동하지 않습니다.
예를 하나들면 우리 「조선일보」 편집국장 鮮于輝씨가 2·3년전 日本東京大學연구실에 가서 한1년 있었는데 논문을 쓰려고 일본의 「朝日」 신문을 비롯한 몇 대신문의 사설을 창간당시부터 조사해서 통계를 내보았는데 90%가 『그래선 안 된다』는 비판적인 방향이더래요.(일동 웃음) 이런 것만을 보아도 언론의 본질적 기능을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 事件에 억매여 理想具現 疎忽
具=그렇듯 너무 언론자체를 엄호하는 입장에서만 얘기를 마시고 언론자신을 비판 반성하는 얘기를 해주십시요(웃음) 그러면 다음엔 언론 면에 나타난 富와 貧의 「언바란스」에 대해서…
李=그것은 언론인의 사회관이나 인생관에 직결되는 문제라고 생각되는데 실제 신문제작에 있어서 그 편집자나 취재기자들이 이 나라 이 사회의 貧富의 차이를 없앤다든가 하는 뚜렷한 의식보다는 그날 그날 타나는 형상에 매달려 있는 느낌이지요.
그래서 보도자체에 끝나지 그런 자각적인면은 결여되어 있을 것입니다.
具=그런데 우리 가톨릭사상은 이런 면에서 목적의식적인면을 요구하고 있읍니다. 사회주의적이라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지난번 강화 JOC사건 같은 것은 그 한 예지요.
■ 골프族 庇護에도 兩論
崔=나는 그 점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오늘의 한국의 언론은 근본적으로 봐서 어떤 통일된 의사, 철학, 원리가 없읍니다. 이것은 어떤 언론인 개인이나 기관에도 적용됩니다. 이 나라 이 사회의 貧富의 격차에 있어서도 그것에 저항을 느끼는 사람과 그다지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읍니다.
가령 지금 생활의 사치로 말썽되고 있는 「골프」만 해도 그것에 유난히 적개심을 느끼는 기자와 찬양까지는 않지만 신사들의 운동으로서 담담히 받아들이는 기자가 있어 한 신문에 있어도 두 가지 눈으로 그 기사가 실리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사회원리나 가치관의 미확립 또는 혼란이 우리 언론의 제일 큰 과제라고 여깁니다.
李=나도 동감입니다 결국 우리 한국 언론인의 「푸린시풀」의 결여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아마 가톨릭교회가 언론에게 요구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 아니겠읍니까!
具=이번엔 언론에 있어서 善惡의 「언바란스」 문제를 윤리위원회 위원장이신 王교수께서…
⑤王=이것도 이제까지 말씀하신 여러 문제와 관련되고 또 비례하는 문제입니다. 윤리적인 의미에 선악관은 둘째로 하고라도 이 사회의 이시대의 가치관에 대한 확립이 없으니 소비는 현대의 미덕이라는 풍조가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검소와 절약은 민족갱생에 길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런 혼란속에서 일부 오락 잡지는 「섹스」와 「에로」를 선정적으로 노출합니다.
■ 哲學의 貧困과 淫談 悖說
만일 정부나 우리 윤리위원회 같은 기관의 제재가 없으면 음화만 가지고 잡지를 만들 기세입니다.(일동 폭소) 또 하나의 경향으론 처음에도 지적한 소비와 사치풍조가 특히 여성잡지 같은데 경쟁적으로 나타나고요. 또 하나 두려운 것은 아동 읽을 꺼리 만화같은데 폭력에 대한 숭상과 그 조장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윤리위원회는 매일 싸우고 있읍니다만 가톨릭의 앞으로의 「매스·콤」 활동에 기대하는 바 급니다.
具=실제 신문사회면 제작에선 어떻습니까? 사회면에 있어 사건 중심으로 제작하면 자연히 살벌하게 되니까 善行이나 美談, 또는 명랑한 소식같은 것을 6대 4, 혹은 7대 3정도라도 실을 수는 없읍니까?
■ 美談 善行記事와 「초롱」論 杞憂
李=그게 그렇드군요. 내가 「데스크」를 볼때 의식적으로 지면을 좀 명랑하게 만들려고 「오아시스」라는 미담 선행란을 두고 지방지국 기자까지 동원해 보았는데 얼마간은 되지만 지속이 안되드군요. 왜냐하면 선행 미담을 실어 가자니까 신문 용어로 말하면 「초롱기사」가 되기 쉽고 심지어는 기자 등이 책임을 완수하려니까 造作까지하는 폐단이 나오거든요.(일동 폭소) 이것은 기자들의 취재의 부실도 있겠지만 정말 선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선행을 숨기거든요.
崔=외국의 신문에 비해서 우리 사회면이 명랑하지 못한데는 그 원인이 있어요. 첫째 취재선이 검찰이다 경찰이다 驛이다 하여 출입처가 국한되 있거든요. 그러니 거기서야 사건 기사밖에 나올게 있겠읍니까.(웃음) 미국의 지방지 예를 들면 한동내 「클럽」 별마다 담당 전문기자가 있어 그동내 그 「클럽」의 인사 왕래 경조간의 소식 등이 수시로 정확히 보도되니까 명랑한 화제 같은 것이 자연히 취재되어 지면이 밝아지지만 우리가 만일 그런 식으로 하자면 현재의 인원 3·4배 더 있어야 되고 지면도 몇 배나 더 늘어야 하니까 도저히 우리의 경제사정으론 생심을 못내지요. 그래서 우리신문은 아예 사건기사 중심으로 되어있고 또 이것을 신문의 正直로 여기게끔 되어 버렸지요!
■文化보다 營利 重点? 經營者
具=이번엔 얘기를 좀 바꿔서 한국 「매스·메디아」에 종사하는 그 종사자들 자체문제에 언급해 보고 싶은데 먼저 운영자들이나 그 운영체에 대해서 좀 말씀을 해주십시요. 즉 문화의식면에 있어 오늘의 우리 운영자들이나 운영체가 과연 타당하냐? 그렇지 못하냐?하는 문제를 말입니다.
王=잡지얘기부터 해보죠. 잡지발행자 즉 운영자들의 99%는 문화의식을 가지고 그 잡지를 경영한다기 보다는 얼마간의 돈과 정열을 가지고 도박을 한번 해본다는게 솔직한 표현이 될 것 같습니다. 막말로 잘 맞아 떨어지면 한 밑천 잡는게고 안되면 만다는 식이 대부분이죠.(일동 폭소)
嶺=한국의 현재 일간은 신문사가 36개 통신사가 6개 합 42개가 있는데 그 발행인들을 하나 하나 언론인으로서의 자질과 품성 또는 경력을 객관적으로 따져볼 때 과연 그중 몇분이 타당하다고 수긍이 갈런지 의문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언론을 위한 신문 경영자는 손꼽을 정도고 그 외엔 사업가가 그 부업으로 또는 엄호기관을 삼는가하면 정치적인 수단으로 삼거나 名利의 미끼로 삼는 등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국 언론에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경영자의 신문인으로서의 자세확립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요, 중요한 문제입니다.
具=그것 없이는 신문의 공정이나 언론에 대한 신뢰란 기할 수 없으니까요. 거기다가 신문 논설진의 문제나 편집인들 문제를 겸하여 언급해 주십시요.
■ 經營·編輯陣의 不協和
崔=신문편집인들의 오늘의 고민이라는 것이 그런 점에 있읍니다. 편집인이라면 주필과 논설진·편집국장과 부장 이상들 입니다만은 이들은 오늘의 운영자와 운영의 실태를 알고 또 그들의 제약을 직접 받고 있거든요. 그러면서도 일선기자들한테 그 실정을 털어 놓을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직업인으로 그 자리를 집어 팽개칠 수도 없는 거죠. 참으로 오늘의 편집인은 불상합니다.
작금에 와서 신문이 기업화 단계에 들어갈수록 더 노골적으로 문의 자세가 그 운영체에 의하여 흔들리기 때문에 충돌도하고 설득도하고 때로 포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들이 운영의 주체를 넘어서지는 못하므로 거기에 순응하고 맙니다.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오늘의 편집인들이 氣慨아니라 右氣慨를 갖는다 해도 소용이 없읍니다. 즉 어떤 발행인이 한계를 정해놓고 이를 강요할 때는 사표를 내고 나가는 방법밖에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일동 웃음) 그래서 한국의 신문계는 외국에 없는 이상한 구조가 되어 있지요. 즉 日本만 해도 신문인협회 속에 발행인·편집인·기자가 다 들어가 있는데 우리는 발행인협회와 편집인협회 등이 별도로 조직되어 있읍니다. 이것을 노골적으로 해부해 보면 발행인들은 자기네들이 신문을 내니까 자기들이 언론을 전체 대표한다는 것이고 편집인들은 발행인들이야 돈이나 냈지 『신문의 「신」자나 아십니까?』하는 정도의 불신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신문주간표어 같은 것도 그 선정에 결렬을 보는 경우가 있읍니다.
■ 知性과 論調와 「샐러리맨」化
具=그런데 신문편집인이나 논설진들의 자체의 문제로서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즉 오늘까지 야당지에서 반정부적인 또는 반집권당적인논진을 펴고 그런 편집제작을 하다가 내일은 여당지에 가서 현실에 영합하는 붓을 드는 것 말입니다.
崔=지금 말씀하시는 바 과거 志士型의 논객이나 편집인 품격을 현실에다 요구하는 것은 조금 위화감을 느낍니다. 역시 지금은 논객이라도 직능적인면이 더욱 강조되고 정착되고 있는 거지요. 물론 지식인으로서의 시대적인 사명감에 副應하는 한도 내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속에서 그들은 求心力을 잃고 좌절감속에서 의욕상실증에 걸려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래 쓰라면 이렇게 쓰고 저렇게 쓰라면 저렇게 쓰는 글쓰는 기계가 되어버리고 자기의 논설이 이 사회를 움직인다는 기백과 용기를 가진 논객이 없지는 않겠지만 몇이나 될지 의문입니다.
具=그다음 오늘의 일선취재기자들의 품성이나 기백같은 것은 어떻습니까.
李=오늘의 일선기자들도 崔주필이 편집인들에 대하여 언급하신 「카테고리」 속에 들것 같습니다.
과거 내가 기자로 발을 내디딜 때에는 보수라든가 또는 그 현실적 조건을 따지고 신문기자가 되지 않았고 막연하나마 사회정의에 대한 의협심으로 출발했고 또 해방직후라 이념 같은 것도 뚜렷했었는데 지금의 기자들은 그 출발부터가 굉장히 「드라이」한 것 같아요. 현실적으로 생활면에 곤난을 느끼니까 그렇겠지만 일종의 「샐러리맨」적 기풍이 발달했다고 하겠읍니다. 일례로는 외근기자를 내근으로 돌리면 사표를 낼 정도요 수당같은 것도 단 몇백원에 신경들을 씁니다.
■ 記者 忌避症 차츰 가셔져
具=좀더 솔직히 말해 오늘의 기자들의 품성과 자질이 향상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기자들에게서 이상인이나 지식인으로서의 기개 같은 것은 빠져버리고 하나의 소시민적 생활인으로서 악덕 같은 것이 성해간다고 생각하십니까.
崔=그걸 누가 자신있게 단정하겠읍니까.(일동 웃음) 오직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읍니다. 기자들도 그 사회의 일원이니까 향상이 되어도 그 사회 각 부문과 비례하며 되어가는 것이고 부패해가도 역시 정비례하는 것이고…
具=당연한 표현이기는 한데 어느 쪽인지 모르겠군요.(일동 폭소) 그러면 화제를 돌려 이번엔 언론의 享受者편에서의 자세랄까, 그런 것을 얘기해 주시는데, 먼저 한국의 정치인들이 언론을 受容하는 자세를 어떻게 보십니까. 흔이 우리 정치인들은 신문기자라면 5·6월의 쉬파리처럼 꺼린다든가 기피하고 경원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崔=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껍니다. 집권당의 정치인들은 언론과 본인을 꺼리고 귀찮아하고 야당인사들은 언론에 오히려 매달리려는 경향까지 있지요.
王=나는 그 裏面相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난 정권시대보다는 오늘에 와서 퍽으나 언론과 정치가 밀착해가는 느낌입니다. 과거엔 아주 平行線을 가다 싶이 하던 것이 이제는 공동의 「비죤」 같은 것을 엿볼 수 있거든요.
崔=그런면에선 많이 시정된 셈이죠.
具=경제나 실업인들의 언론에 대한 자세는?
李=글쎄. 나도 자신있게 답할 수는 없읍니다만 과거에 비하면 경제계도 언론에 대하여 인식을 새롭게 하고 이제는 좋은 의미에서 언론을 이용하려는 단계까지 오지 않았나 하는 감이 있읍니다.
그 상업적인 「피알」은 물론이지만 국가적인 산업을 이룩하는 데는 언론의 협조가 불가결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언론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눈에 뜨입니다.
具=다음은 청소년과 「매스·콤」의 문제인데 「텔레비」나 방송의 해독을 어떻게 막느냐하는 문제를 당면문제로 삼고 계시는 金 신부님과 王 교수께서…(일동 웃음)
■ 봐서 안 될 TV 보다 健全하게
金=이런 얘기를 들은 일이 있읍니다. 어떤 가정에서 어린애들 때문에 「텔레비」를 치워버렸더니 그 다음엔 애들이 집엘 붙어 있지 않드래요. 이웃집으로 「텔레비」 구경을 가는 거죠.(웃음) 결국 그 집에서도 다시 「테레비」를 놓았다는 군요. 『텔레비」나 방송은 시청각에 직접적으로 호소해 오기때문에 불량독서 보다도 몇배의 해독을 가져올 수 있지요. 그런데 역시 受容者가 안본 다든가 또는 못보게 한다든가하는 방법은 소극적인 것으로, 그 제작자들이 건전한 윤리성에 입각해야 하고 또 청소년을 위한 배려를 촉구하는 길이 가장 첩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새 구라파소식을 들으니 어린이들 「푸로」에 교회가 힘을 쓰되 거기다 어른들 교육까지를 포함시키는 방법을 연구 한답니다. 즉 어른들의 비행이나 탈선을 아이들의 생활과 그 입을 통해 시정하자는 거지요. 예를 들면 아이들 대화 속에서 『너희 어머니는 왜 성당에 안나오시니?』라든가 『너희 아버지는 술을 많이 자신다지?』라든가 하는 식이죠.(일동 웃음) 이렇게 해서 어린이와 부모들이 함께 보고 또 함께 즐길 수 있는 「푸로」를 만든다는 것은 좋은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敎會 參與해야
王=오늘 한국의 「매스·콤」은 어른들을 위한 것뿐이지 어린이를 위해서는 아주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린이들을 위해서 범람하는 것은 不良과 악덕이 관사로 붙는 것뿐입니다. 이 무방비상태를 시정하기에는 나는 정치의 힘 법의 발동이 필요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텔레비」 같은 것을 보면 이것은 2·30대의 젊은이들에게 어떨는지, 어린이들커녕, 나도 눈꼴이 시어 못볼 지경입니다.(일동 폭소)
이것이 곧 청소년들을 향락주의로 타락시키고 마비시키는 거죠. 이런 면에서 앞으로 가톨릭에서 청소년문제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할 줄 압니다.
具=모든 것이 가톨릭이 책임져야할 문제뿐이고 또 가톨릭사회원리가 이 사회에 적용돼야 하겠고 하니 결국은 모두가 가톨릭신자가 되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군요.(일동 폭소)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한국 언론에 대한 제안 같은 것을 한마디씩 해주십시요.
■ 商業·敎育의 効果的 調和
李=결국 오늘의 「매스·콤」이 그 운영의 자본력이 넉넉치 않고 수지타산이 안맞기 때문에 그 享受者들의 관능적인 말초신경까지 자극시켜 아슬아슬한 선까지 가면서라도 이를 널리 보급해 보자는 데서 건전성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상업주의적인 면을 사회교육적인면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데 오늘의 우리 「매스·콤」종사자들의 고민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이는 또한 우리교회의 생각이기도 할 것입니다. 교령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이러한 현대의 고민과 약점을 놀랠만큼 투철히 파악하고 있읍니다. 역시 우리는 교령이 가르치는바 원칙을 우리 직능생활에다 각자 반영시켜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王=비슷한 얘기입니다만 오늘날 우리 「매스·콤」이 너무나 물질주의에 흐르고 또 이를 숭상한다고 보여집니다. 「매스·콤」에 나타나는 우리의 생활이란 마치 사치 「사치경쟁」 같은 느낌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자라나는 우리의 새세대들의 앞날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나는 역시 정부와 국가에 그 책임을 묻고 싶고 일대 청소년시책을 바라는 것입니다.
■ 政府使命 莫重
고속도 도로를 어느 한곳 안하고서라도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텔레비」나 교육전문 방송국 같은 것을 만들어 청소년들에게 건전한 교양과 오락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具=교령속에도 국가의 의무를 특히 촉구한 개조가 있읍니다. 교부들의 생각이나 王 교수의 생각이 어쩌면 그렇듯 일치하는지 모르겠군요.(일동 폭소)
崔=내가 가만이 생각하건대 우리나라 전국 신문중 아무런 정치력이나 경제적 압력을 안받고 그야말로 진정한 언론을 펴나갈 수 있는 신문사는 大邱「매일신문」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점 「경향신문」을 가톨릭에서 놓친 것은 아까운 일이죠. 이런 의미에서도 앞으로 한국 언론에 있어 가톨릭의 嚴正한 영향력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 人材 養成을
金=우리 한국가톨릭이 이 나라 이 사회에 참된 발전을 위해서 또한 「매스·메디아」의 순화를 위해서도 그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고는 생각하고 있읍니다만 실제 그 방법이 문제 올시다. 흔이들 가톨릭도 「테레비」나 방송시설을 곧 갖춰 야 한다는 소리를 듣지만 거기에는 경제적, 인적문제가 단순치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현단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재 한국에 시설되어 있는 「매스·메디아」에 우리가 능동적으로 뛰어드는 것으로서 이를 위해서 가톨릭적인 인재양성을 선결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우수한 직능인으로 각 기관에서 자각을 가지고 일을 한다면 우리의 본 목적과 사명이 자연적으로 달성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具=이것으로 좌담은 끝맺겠읍니다만 金 신부님 말씀에 한마디 덧붙인다면 가령 교회가 양성한 「라이타」(執筆者)중에 이 사람같이 「에로」나 「섹스」를 못쓰는 작가가 나와 팔리지 않으면 그것 역시 徒勞가 될 우려가 있지 않겠읍니까?(일동 폭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