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튜디오」속의 나 / 權貴順(TBC 아나운서)
甘味롭고 부드러운 音聲으로 愛人의 귓가에 속삭일때 처럼
어느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선 나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스튜디오」 정경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마이크」 앞에 앉아있는 낯선 출연자, 그의 앞에 놓여 있는 테이블은 원고지로 꼭꼭 메워져 있다. 손잡이를 잡은 채 멍해있는 나를 보며 출연자는 머뭇머뭇 입을 연다.
『저 소-소리가 날가봐 이렇게 원고지를 차례대로 전부 펴놓았어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지금 자기가 만들어 놓은 우수꽝스런 한폭의 그림을 애써 납득시키려는 듯 내게 설명하는 그의 얼굴은 차라리 울쌍이다. 자칫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밀어 넣으면서 표정을 부드럽게 가다듬어 「테이블」로 다가갔다.
『오-오분이면 얼마나길 까요?』
크고 잘생긴 눈이 불안을 담고 있다.
(이 괴롭고 숨막힐듯한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저렇게 젊고 커다란 남자가 겁을 잔뜩 집어먹다니 왈칵 가여운 생각이 든다. 구원이라도 청하는 듯 내게 매달리는 시선을 잡고 참지 못해 웃음을 터뜨린다면 그것은 얼마나한 비정일까.
『뭐 별로 길지 않아요. 말씀 하시다 보면 금새 흘러 버릴거에요』
그 눈은 억지로 웃고 있으나 종이를 집어든 손이 바르르 떨린다.
아직 「큐랩프」에는 빨간 불이 켜지지도 않았는데.
그러나 하얀 손수건으로 땀을 벅벅 문질러대던 그가 「스튜디오」를 나와 어느 차집에서 몇 사람과 차를 나눌때 쯤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호탕한 웃음과 그럴듯한 얘기로 연신 사람을 웃기는데, 그런 그의 재주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스튜디오」라는 그 좁은 실내는 사람을 숨막힐듯 긴장시키고 저렇게 큰 남자를 가련한 새처럼 떨게했을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괴물처럼 보이더라는 그의 말이 아니라도 조그만 숨소리까지도 흡수해버리는 너무 지나치게 예민한 이 마이크는 확실히 무서운 것 같다. 「뉴스」 원고를 들고 마이크 앞에 앉을 때마다 격는 긴장과 떨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순간들이 좋아서 여기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터운 세겹 유리로 바깥 세계와 차단된 네모진 자그만 방안 그안 마이크 앞에 앉으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얌전하고 정중한 그리고 가장 착하면서 무엇보다 으쁨이 되는 얼굴로 그러나 항상 조심스럽게 떠는 기분으로 입을 연다.
『감미롭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사랑하는 이의 귓가에서 속삭일 때처럼』 이 말을 상기하면서.
참말 매력이 있어 몇 모르고 뛰어 들었던 그때를 무색해 하며 그렇게 벌써 이 좁은 실내 「마이크」 앞에서 몇년이 흘렀다. 전파를 타고 흘러나간 나의 작품에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으며 조심스럽고 긴장된 마음으로 조금씩 나는 커왔다.
『유리 동물원』
몇겹 유리 저편에서 입을 옴지락거리며 얘기하고 있는 「스튜디오」 풍경에 이런 이름을 붙여준 사람들이 있다.
그 앞을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고 신기한 뜻 들여다보기도 한다. 방음장치가 썩 잘된 이 방안은 어쩌면 가장 오붓하고 참하게 「나」를 즐길 수 있는 포근한 나의 고향 같기도 하다. 아주 오래 오래, 내 얼굴에 주름이 몇개 더 그어질 때 까지도 지키고 싶은 우리 동물원.
정중하고 진지한 자세로 「마이크」와 대화를 나누면 「갇힌자」의 슬픔과 불안 같은 것은 아무도 없다. 갇혀 있다는 기분은 이 경우 오히려 가장 보람된 시간일수 있는 것이다. 유리 동물원에 갇힌 즐거움과 보람에 나는 이곳을 훌쩍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 교회 잡지 / 具仲書(文學評論家)
貧弱하기 이를데 없고 類例(없이 싼 原稿料
한 달에 수백페이지의 전지면을 메우기 위하여 늘 분주하게 사는 잡지계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요즈음 퍽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힌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매클루헌」의 이론이란 것이 있다.
「매클루헌」은 「매스·메디아」를 문명의 중심으로 보며 「매스·메디아」가 사회조직을 결정하는 관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매클루헌」의 이 이론이 「목적 없는 수단의 승리」를 결론으로 표방하고 있는 점은 수긍할 수 없지만, 현대 사회에서 「매스·메디아」의 위력은 날로 비대해가고 있으므로 그것이 문명의 중심이 되고 사회조직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데엔 수긍이 가기도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잡지들은 최고급의 지성지라고 하더라도 우리 앞에 놓여있는 현실에 밀착된 일관된 편집의도가 부족하여 산만한 지면을 드러내고 있으며, 또 중류교양지라 할 수 있는 가정잡지 이른바 여성지들은 격에 맞지 않는 사회와 오락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또 교회의 잡지 특히 「가톨릭청년」이나 「경향잡지」 같은 것은 마치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꾸며내는 듯 빈약하기 이를데 없는 체재를 부여주고 있다. 「가톨릭청년」 「경향잡지」는 전국에서 가장 긴 역사를 지니고 있으면서 아직도 백페이지 미만의 적은 지면을 그나마 한국에서 유례가 없이 싼원고료로 글을 받아 꾸며가고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도끼가 손의 발전이고 차가 다리의 발전이라면 「매스·메디어」는 인간의 마음의 발전』이라는 말이 있다. 사회와 교회의 「매스·메디아」가 타락해있고 빈약하다는 것은 사회와 교회의 정신이 그 만큼 허약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잡지를 읽는 사람들은 거기에 뚜렷이 얻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촉각적인 자극을 주는 오락기사나 형식적인지면은 독자에게 남겨 줄 것이 없다. 여기에서 한국의 독서인구는 점점 소멸되어가고 있으며 진실과 정의의 보급은 수단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 時間을 追擊하라 / 金壽煥<東洋TV 編成部)
마감 直前(직전) 달려온 출연자 放送(방송) 끝내자 온몸에 식은 땀
「텔레비젼」을 처음 보게된 것은 1956年 여름 어느날 저녁 종로 네거리 가두 「텔레비젼」이다. 참! 신기하기도 했다. 어찌된 일일까 하며 맥을 놓고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주위에는 오십여 명이 운집해 있었다.
때는 벌써 적녁 9시다. 저녁식사도 못하고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몹시 피로해 집에 돌아갔을 때는 11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신기하게만 생각했던 「텔레비젼」은 어느덧 10餘星 상이 지났고 오늘에 와서 TV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것은 미쳐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 내가 TV 初年兵으로 學生들의 「퀴즈·프로」를 맞고 있던 어느 해 여름의 아침 출근을 하자마자 「페이파·워크」로부터 始作해서 온 종일 準備에 분주하기 끝이 없다. 출제된 문제들의 檢討 「세트」 준비, 小品준비, 등등…
「아나」室로 我 「아나」를 찾는다.
『오늘은 어느 학교, 어느 학교지』
『응, 오늘은 S학교 그리고 Y고등학교야. 그래 「게임」이 재미있을까?』 시간은 흘러 벌써 6시가 된다.
그런데 웬일일까? 5시 30분까지 꼭 오라고 했는데 S학교生들이 오지 않는 것이다.
전화통을 들고는 뚜드려 댄다. 『S고등학교 빨리 대주시요』 했을때는 벌써 방송시간 5分 前이다.
전화는 계속 통화중, 전화통을 집어던지고 현관으로 뛰어 내려간다. 혹시 밖에서 기다리지나 않을까? 하고 학생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좋을까 큰일이다! 방송이 「빵꾸」로 구나! 하고 단숨에 8층까지 뛰어 오른다. MD한테 「휠라」를 돌려달라고 부탁한다. MD는 난처한 표정이다. 그때다 학생들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다. 숨쉴 사이도 없이 「스튜디오 큐-」
어느덧 방송이 끝났다. 온몸에선 식은땀이 쭉 흐른다.
■ 놀란 記者 / 金海鎭(조선일보 지방부기자)
신부가 사기부도수표 남발 엉뚱한 記事에 진땀 흘려
3년전 어느날 오후 7시 편집국 사동으로부터 윤전기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지방1판 신문(강원 1부 경·남북 충남·북 지역)을 받아 사회면을 펼쳤을때 깜작 놀랐다.
초호 활자로 「신부가 사기」 제목의 중간틈 기사가 났으니 말이다.
「가짜스님 수배」 기사 따위는 간혹 나기는 했으나 「로만·칼라」의 신부가 사기란 전대미문이었으니 신자입장이 아니더라도 놀라지 않았다면 목석일게다. 대충 기사를 읽는 둥 마는 둥하여 당시 尹壬述 편집부국장(현신아일보편집국장)에게 나아가서 애원조로 이렇게 따졌었다. 『부국장님! 이거 제목이 너무 심하지 않읍니까? 신부가 사기라니 붉은 신문에서나 하는 수법이지 이거뭡니까?』 『종신층각인 신부들이 무슨 놈의 든 욕심이 난다고 사기를 쳐먹겠웁나까』 『가톨릭을 잘 잘 이해하실텐데, 2판(전남·북·충남·북) 3·4판(경기 강원 서울 제주)에는 좀 봐 주십시시오』 『기사내용을 보니 입건기사인데 당해 신부의 해명도 없지 않읍니까』라고. 결국 이 치욕적인 대문짝 기사는 尹 국장의 료해로 빼게됐던 것이다.
고마움을 필자가 생명을 다하기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
이 문제의 기사는 서울 어느 본당신부가 모신자에게 단지 『달라를 바꾸어 주겠다』고한 말한마디 때문에 악용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년몇개월전 어느 석간일단신문을 직장에서 읽었을 때의 일이다.
각 석간지에는 서울주교대 모신부가 부도수표 남발 혐의로 구속됐다니 또한번 놀랐다.
어떻게 된 일인지 높이 론바 「유력교우」가 아니여서 알수가 없다.
그러나 우선 이 보도를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각사 선배들에게 염치불구하고 서울판에라도 빼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으면 식성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
교환양에게 자신문사를 호출하도록 하여 동아일보 사회부장 李효식씨, 서울신문 사회부장 金태운(교우·부재중이였음)씨, 대한일보 사회부장 洪돈섭씨, 경향신문 사회부장 魚임영씨, 신아일보편집국장 尹임술씨 중앙일보사회부장 張병칠씨 등에게 하소연하여 거의 서울판에는 빼 진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같이 선배들에게 신세를 졌다. 빵문제로 신세진 것은 아니다. 지금껏 고맙다는 인사한마디 못한 주머니 사정-.
또 어떤 敎會일로 自進하여 부탁할 勇氣가 나지 않는 것이 率直한 心情이다.
■ 딴따라 論 / 韓星(영화제작가)
信仰心(신앙심)지닌 映畵人(영화인)의 고달픔 『왜 같은 罪(죄)를 연달아 짓나!』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고달픈 직업의 하나일 게다. 적으나 크나 양심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 더욱 그렇다. 흔히 사람들은 영화에 종사하는 축을 「딴따라」라는 대명사로 부르는데 심하면 「쟁이」라는 존칭어(?)까지 붙여 주니 이쪽에서 고맙다기에는 오히려 저쪽의 낮이 붉어질 염려가 있으므로 예사로 넘기기가 일쑤다.
「딴따라!]
참 재미있는 어감이다. 童詩의 한 구절같이 천진난만한 정서를 풍겨줄 뿐아니라 4분의 2박자의 리듬을 타고 흐르는 C장조의 멜로디를 연상케하며 아롱아롱한 색감은 이른 봄철 파릇한 바탕에 수놓은 작은꽃들처럼 친근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실은 이 「딴따라」라는 형용은 섭섭한 말이다. 나팔 소리를 입으로 흉내 내기는 했지만 그것도 신파조 유행가를 본떠서 빈정대는 뜻이라니 말이다. 따는 그럴 법도하겠지 영화란 펜과 페인트와 도랑과 나팔 등으로 엮어지는 제품인데 이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은 도랑과 나팔, 이를테면 배우와 음악이란 말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다소 그러할 사정이 없진 않았지만 이런 부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특히 『쟁이』라는 대접을 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으뜸이었는지도 모르는 탓이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엄숙한 간판이 붙은 진열장 안에서 비생산적이고 비윤리적(실은 아니지만)이고 화류계적인 「딴따라」가 천시된다는 것은 거의 숙명적인 현상일게다. 그러나 세대는 바뀌고 사회의 양상이 달라진 오늘날에도 「딴따라』가 있을 수 있느냐가 문제다.
물론 부르는 측이 있으니 불리우는 측이 있는게 틀림없는데 그러한 측이 무엇일까? 언젠가 지방흥행사와 작품의 상거래관계로 주흥석을 벌였었다는 이야기다. 의례이 이런 데에 흥정을 하게 마련인데 묘한 것은 주흥을 끝내고 난다음의 친절이었다. 어찌면 이 천절(?)이라는 것이 상거래의 결정적인 포인트일지도 모른다. 다음날 불가불 고백성사를 보게 마련인 것까지는 한번봐줘 넘겼다치고 며칠이 안되어 또 고백신부님의 말씀이 『왜 같은 죄를 연달아 저질렀느냐』고 툭쏘는 데는 아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딴따라」는 남의 야기가 아니었을 께고 「딴따라」는 「딴따라」를 뇌까리며 성당문을 나올 수밖에… -씨네마·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