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여름 노래는 과거형으로 쓰여 있어 가을의 입구(入口)에 자주 인용된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읍니다…』
태양의 조사(助射)를 아쉬워 하며 이 장미의 시인은 섭리의 손짓을 경건히 읊조린다. 그러나 여름은 위대했을 뿐이지 위대한 것은 아니다. 즉 현재진행형으로 찬미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연옥(煉獄)… 햇볕의 용광로가 죄인들을 단련한다.
천국에의 계단처럼 곧 가을이 오지 않는가? 대륙성 기후로 사계(四季)의 구별이 명확한 중위도(中緯度) 온대권의 KOREA는 어쩌면 복받은 땅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처럼 표면적이 크고 따라서 한선(한腺)의 기능이 왕성한 인자(人子)에게는 가시면류관을 쓰는 수난절(受難節) 일수 밖에 없다.
체중을 「트레이너」처럼 끌고 다녀야 하니 엔진은 마력(馬力)을 잃게 마련, 「카렌다」에 쓰인 7·8월의 아라비아 숫자가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고갯마루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포유류는 왜 하면(夏眠)을 못하는 것일까?
겨울과 싸우느라 온돌을 만들어낸 조상들은 여름에는 무방비상태 소수의 왕족들만 빙고(氷庫)의 어름쪼각을 핥고 지냈다.
현대의 이기(利器)인 「에어콘디쇼너」나 선풍기는 협소한 공산의 소영주(小領主) 울밖에 나서면 폭염의 대군이 엄습해 온다. 작전상 후퇴처럼 여름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피서(避暑) - 겨울은 방한(防寒)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유현한 산그림자와 영원한 괄약근(括約筋)처럼 쉬지 않고 운동하는 바다는 그러므로 여름에의 요새(要塞)가 된다. 그러나 침묵하는 산보다는 포효하는 바다가 나는 좋다.
원래 지구는 바다밑 지금도 바다는 우주의 10분지 7이다. 지구의 생성(生成)이야 어쨌든 산의 고고(孤高)보다 바다의 포용(包容)에 나는 더 경사(傾斜)되니 지자(知者)이기에 앞서 (仁者)가 되고 싶은 것일까?
바다는 늙지 않는다. 나도 영원히 젊고싶다. 바다는 늘 노래한다. 나도 그렇게 푸르름을 구가하고 싶다.
그리고 바다는 모든 세류(細流)와 지류(支流)를 받아들이는 본류(本流)이첨며 그 시원(始源)이기도 한 것 그 무한대의 용량(容量)이 나를 매혹한다.
「에메랄드」의 피부 위에 둥둥 떠서 해안선을 따라 흘러가는 나의 여름은 참으로 위대할는지 모른다.
그 해안선에의 그리움으로 땀을 씻으며 나는 이 연옥같은 여름을 살아간다.
任宅根(文化放送局 常務)
컷 : 金光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