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된 「테마」는 가톨릭 언론인의 사명이다. 이 벅찬 제목 앞에 당황하거나 당돌히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할말을 다하기엔 공간이 태부족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예수회원 롬바르디 신부의 웅변을 좋아했다.
공산주의자의 「이데올로기」는 말크스에 있다고 하지만,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복음성경에 다 있다.』
이 말을 되색여볼때, 우리들의 사명도 거기다 있다고 할 수 있다. 허지만 결론은 쉽다. 원칙들도 부족할리 없다. 우리는 진지하게 방법을 논의할 상황아래 놓여있는 것이다.
가톨릭 언론인들은 사회의 가장 노출된 첨단에 나서서 현실과 대결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매일 매일 그날의 결론을 내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 「져날」이란 뜻은 그런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숨가쁜 생활을 하는 동안, 자칫하면 자기를 망각하기 쉽다. 더구나 가톨릭신자로서의 자기를 잊기 일수이다. 「나」를 출발점으로 하지않는 철학을 생각해볼 수 없었다. 그만치 나의 값은 소중한 것이다. 가톨릭인으로서의 「나」는 곧 나의 완성을 말한다. 간봄에 「협동교육론」을 번역해본 일이 있다. 그때 IONVLVEMENT의 원칙이란 낱말이 나왔다. 이 말을 어떻게 옮겨 놓느냐? 사전을 뒤져보면 「어떤 사건에 말려든다」는 해설이 나와 있다. 서강대학 김태관 신부님은 「끼어들기」의 원칙이라고 번역했다. 나는 「섞여들기」에 원칙이라고 해봤다. 어떻든 끼어들고 섞여드는 것이 「인볼브먼트」의 원칙이다. 우리가 만일 市中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우리 신자들을 곧잘 누룩에다가 비유하고 있다. 누룩은 밀가루와 잘 반죽이 되지 않고서는 제구실을 못한다. 하기야 유리병속에 담겨있는 것 누룩임에는 틀림없다. 아주 좋은 누룩으로 전할 수도 있다. 허지만 제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끼어들고 섞여들어야 한다.」
가톨릭언론인은 그가 어떤 분야에서 일하고 있든 반드시 가장 영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성바오로와 같이 탁월한 문필인이 되어야 한다. 신자들이 다른 직장에 있어서도 성공할 수 있어야 폭넓은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지만 이 「매스·콤」 분야에서는 상당한 지위를 확복할 필요가 더욱 크다.
끝으로 가톨릭 언론인 「使命感」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한 「使命感」은 우리를 굳건히 붙들어 주는 힘이 된다.
생활에 쪼든 젊은 아낙들은 곧잘 이런 말을 입에 담는다고 한다. 등에 업힌 것만 없으면 팔짜를 고쳐보겠노라고. 등에 딸린것은 귀여운 아기이다. 희망이다. 버릴 수 없는 희망인 것이다. 그것을 버리고 어떻게 팔짜를 고친다는 말인가?
이런 말을 되씹어보면 버릴 수 없는 인간의 사명을 느낀다. 독일의 철하자 피흐테의 「인간의 사명」을 다 읽어도 이런 느낌을 얻어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가톨릭 언론인이라는 이름과 함께 있다. 다만 그 이름때문에 조여드 책임감을 어찌할 수 없다.
『가톨릭 져널리스트!」 우리와 떼놓을 수 없는 「타이틀」이다. 비록 우리가 대과를 범하고, 모든 희망을 버릴만큼 구멍에 빠졌을 때도, 그 이름은 우리와 함께 있다.
이렇게 놓치지도 못하며 항상 붙들려있는 우리의 사명감 그리고 우리의 所屬感이 중요한 것이다.
姜達秀(筆者·東亞放送解說擔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