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NC】 몬시뇰 죤 P. 돈넬리 記=지난 19년동안 신구(新 · 舊) 「예루살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증오(憎惡)의 상징인 석벽(石壁)은 중동(中東) 전쟁으로 말미암아 분쇄되었으나 성지(聖地) 「예루살렘」에는 지금 석벽보다 더 끈질긴 증오감이 깔려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교 신자나 회교도 및 유태교도가 다같이 신성한 곳이라고 소중히 여기는 「예루살렘」은 중동전쟁 때문에 이제 전세계로부터 『너희들이나 서로 사랑하라』고 조롱받는 「아이러니」를 되씹게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가 죽음을 당하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이곳 성지의 교회와 교회기관의 건물들은 지붕과 벽에 구멍이 뚫린 탄흔(彈痕)을 안은채 전재민 수용소나 상이군인들을 위한 병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하나인 「오말」의 회교사원은 수많은 총탄이 스쳐갔고 성도(聖都)의 북단(北端)에 있는 「만델바움」 문(門) 일대는 지금은 수라장이 되었으며 부근에 위치해 있던 가톨릭기관의 건물들도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십자군 시대에 건축되어 고고학자들이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성안나」성당도 6월 8일에 있었던 격전의 틈바구니에서 건물정면과 「돔」(둥근지붕)이 폭탄과 포탄에 맞아 갈라졌으며 지붕 위에도 갈라진 틈이 생겨 고고학상으도 큰 손실을 입었다.
「성안나」성당은 성서에 기록된 「프로바티카」연못이 있던 자리이며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하신 곳이라고 전하는 반면 성모의 탄생지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또한 「올리브」산 경사지에 있는 「도미누스 플레비트」성당의 창문은 일부 파손되었고 「만델바움」문과 「다마스코」문 사이의 전략선에 위치해 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서학교와 도밍고회(불란서계) 성당 및 「성스테파노」대학의 창문은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되었는데 이곳에 있는 종탑도 욜단 포대의 포탄에 적중되어 크게 파손되었다.
「시몬」산에 있는 「성모죽음기념」성당의 「돔」도 탄흔으로 얼룩져 볼품없게 되고 말았는데 이 성당은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자리이며 다위왕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이다.
「다마스코」문과 성서학교 부근에 있는 프란치스꼬회 수녀원 부속성당은 포탄이 성당 안에 떨어져 2만5천 「달러」 상당의 피해를 입었고 그 이웃에 있는 독일계 「슈믿트」여자대학과 부속성당은 폭탄에 맞았으며 전쟁발발 1개월전에 봉헌된 한 부속성당도 포탄에 맞아 지붕에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예루살렘」 동북쪽 1-2 「마일」 지점, 이스라엘 주력부대의 통로에 있던 교황대사관 뜰에도 폭탄이 ㄸ러어지고 여기저기에 유산탄과 포탄이 날아들었다.
6월 8일에는 「베틀레헴」에 폭탄 세례가 퍼부어졌으나 교회기관에는 심한 피해가 없었고 다만 미국 제수녀원과 대성당 앞 광장이 입은 피해가 눈에 띌 정도였다.
이같은 전화(戰火) 속에서도 사제들과 수도자 및 신학생들으 인명피해는 없었으며 다만 「멜키트」전례 신학생 한 사람이 부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성지(聖地)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인 성서족자(族子 · 두루마리) 중 신(新) 「예루살렘」의 「헤브레아」대학 지하서고(地下書庫)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조금도 손실된 바가 없으나, 「팔레스티나」의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그 일부가 분실되었을 것이라는 풍설이 나돌고 있다.
이 족자는 1947년 「예리코」 근처의 동굴에서 한 목동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고 이어 그 주위에 흩어져 있는 여러개의 동굴 속에서 수많은 족자와 단편들이 발굴됨으로써 성서 연구에 혁신을 가져왔었다.
한편 점령지구인 구(舊) 「예루살렘」에 파견된 이스라엘 외무성 대표 라파엘 레비씨는 전쟁개시일부터 성지의 모든 성물(聖物)을 보호해왔다고 하면서 넓은 지역에서 치뤄진 전쟁치고 이만큼 적은 피해를 준 전쟁은 역사상 그 유례가 없다고 말했다.
이같은 불상사를 예상한 전세계 종교지도자들은 1948년 이래 「예루살렘」에 대한 아무리 미소한 파괴행위라도 근절키 위해 「예루살렘」을 국제화하자고 호소해왔다. 현지 여론을 들어보면 거의 모두가 국제화를 주장하지만 이스라엘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같은 조치가 없을 때 증오는 평화의 왕국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다행히 국제화가 이뤄지면 희망과 불빛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