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弘報(홍보) 野話(야화)] 敎會(교회)의 어제와 오늘사이
예수 降誕(강탄)하면 TV로「垂訓放送(수훈방송)」?
朝鮮敎區(조선교구) 當時(당시) 敎會弘報(교회홍보) 최첨단 걸어
세계최초의 無線(무선) 送受信(송수신) 聖廳(성청)서 부터
最尖端(최첨단) 聖廳(성청) 매스콤에 대한 後進(후진) 韓國(한국)매스콤
비오 12세 성청지의 자기 發言(발언) 반드시 親(친)히 校正(교정)
『교황 심문하는 법 아니냐』 기자 나무랜 요한 23세
신문기자로 신세망친 추기경 후보 델라꽈 主敎(주교)
옛날사람들은 默想을 하거나 공부를 할양이면 한적한 곳을 찾아 소음을 피하고 혹 10년 공부라도 하겠다는 사람은 아예 산간벽지나 山寺를 찾아 정신을 통일하고 목적한 한곳을 주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요지음은 세상이 아주 달라졌다. 묵상을 하기 위하여 다밤엘 가는 사람이 많다. 무엇을 꼼꼼히 생각하거나 특히 내 인생을 돌이켜 성찰할 마땅한 장소는 다 방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적막한곳에서 묵상을 할려면 용하게 마귀란 놈이 찾아와서 온갖 환상과 잡념으로 모처럼의 묵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다방에 가서 그 소란한 「쨔즈」 음악과 몽롱한 자煙속에서라야 정신이 통일되고 하느님을 觀想하며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避靜하러 다방엘 가야한다.
유행을 마치 무슨 죄악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도 유행을 따라야 한다.
싫다는 젊은 아이들을 억지로 끌고 「피정의 집」을 찾을 것이 아니라 지도신부가 앞장서서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소에 가서 지도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교회가 중세기에는 유행을 열심히 따랐다. 그 중세기의 聖歌 그 지루한 가락을 들으며 미사참례 하라니 젊은 것들이 질색을 한다. 「하숙 집」인가 하는 유행가, 「인생은 나그넷길」로 시작하는 이 가요는 젊은 사람들이 즐겨 부른다. 신부님이 강론대에서 『인생은 이런것」이라고 목에 핏대를 올리는 것보다 유행가를 훨씬 잘 알아듣는다. 『이 찬流之世上을 떠나 天國본향으로 가자』는 설교보다 李미자의 「내 고향이 좋와요」가 소리도 곱고 이해도 빨리 간다.
어떤 수녀들은 「세속음식」이라고 바깥 음식은 일체 먹지 않는 다지마는 세속 노래가 따로 있겠는가. 「아동미사」에는 동요를 「청년미사」에는 좋은 유행가를 골라 도입해봄이 어떤가? 싶어진다.
이런 유행가가 이처럼 젊은이들의 마음을 신속하게 또 널리 사로잡는 데는 「라디오」의 공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다. 무서운 홍보기관 이다.
요지음 아이들은 집에 돌아오면 「라디오」와 더불어 생활한다. 공부할 때도 밥 먹을 때도 「라디오」만은 결에 놓고 있다. 장학금을 탄 特待生에게 공부하는 비결을 물었더니 「라디오」를 들으면서 공부를 하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공부가 잘 된다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전연 「라디오」를 이용할 줄 모르고 있다. 예수님의 「山上垂訓」의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 당시로서는 최신, 최첨단을 걷는 홍보방법이었다. 현대에 예수님이 다시 강탄하신다면 아버지 요셉과 목공소를 경영하시며 「트란지스터」가 울리는 경음악에 얼마나 일손이 빨라지시겠으며 마침내 31세가 되시는 봄에는 제일먼저 T·V와 「라디오」와 「마이크」를 앞에 놓고 「가난한자」에게 위로의 말씀을, 그리고 복음을 「보다 신속하게」 「보다 널리 전하는 垂訓放送을 하시리라.
우리는 지금 방송국도 없다. T·V는 감불생심이다. 남이 경영하는 상업방송의 「프로」하나 살 엄두도 못 낸다. 가톨릭일간지 하나 없다.
오늘처럼 「매스·콤」이 판을 치는 세상에 본질적으로 「傅敎」를 위주로하는 교회가 홍보에 있어서는 아직 성신의 은혜를 많이 받지 못한 것 같다. 없는 힘을 다해서 경영하는 신문이 포루투갈의 호화선 「쌍타·마리아」호 처럼, 과연 「로마」로 가는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지 그 이름과 달리 그 배가 향하는 항로를 아는 사람은 아 무도 없다. 가톨릭지는 아니지마는(모든 매스·메디아가 그러하듯) 도색 運載物 잘 신기론 1등, 그래서 新聞倫理委의 주의나 경고도 곧잘 받아서야. 「매스·메디아」에 관한 교량이 없더라도 현대에 있어서 홍보활동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는 것은 상식 이하에 속하는 문제다.
우리나라에 아직 「朝鮮敎區」하나 밖에 없었을 옛날이 근대화를 부르짖는 현재보다 오히려 우리 교회는 더 신식이고 더 멋쟁이 었다. 경향잡지의 前身인 「寶鑑」이 간행된 것이 光武初年이니 李朝때 이야기며 光武10년 즉 1906년에 京鄉新聞이 週刊紙로 창간되고 그보다 3년후인 隆熙 3년에 京鄕雜誌의 창간을 보았으니 그 당시로서는 우리교회가 근대화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었고 지금의 우리들 보다 「매스·메디아」의 중요성을 훨씬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 당시는 T·V도 「라디오」도 없을 때다. 잡지와 신문이면 최점단이다.
일반사회의 간행물의 비중의 크기란 지금의 우리의 간행물이 어찌 그 당시를 따르겠는가? 그러던 한국교회는 이 「매스·콤」에 있어서는 확실히 후퇴했고 후진성을 변명할 길이 없으리라.
그러나 「로마」는 그렇지가 않다. 예나 지금이나 「매스·메디아」의 최대의 이용자요, 개척자다. 「로마」 성청은 이 점에 있어서도 언제나 시대의 최첨단을 걷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니가 1896년에 電波를 사용하여 통신하는 법을 발명하고 그 실험을 한 것도 「바티깐」에서였고 세계최초로 電線없이 그야말로 無線으로 「바티깐」과 濠洲의 「시드니」 간을 送受信한 것도 교황청 안마당에서였다. 그리고 그때 그 자리에 현재도 교황청 무전국이 세계를 향하여 전파를 날리고 있다. 「삐오」 11세는 종전에 이태리정부에 일임했던 「라디오」 방송을 교황청이 단독으로 운영하여 「바티깐」의 대세계방송을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각국이 앞을 다투어 불나는 경쟁에 열중하고 있는 海外放送의 시초였던 것이다. 교황성하의 거실에는 錄畵나 錄音이 아니고 직접 TV방송을 할 수 있는 완전한 장치가 되어있다고 하며 요한 23세도 또 현 교황 오로 6세도 지난 「바티깐」 공공의회장 그리고 금반주교 「시노드」 회의장에 T·V送信장치를 해두고 자기 방에서 회의광경과 또 어느 주교가 무슨 발언을 어떻게 하는지 친히 보고 계셨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지난 주교 「시노드」 때 우리 서울大敎區의 金壽煥大主敎님이(當時는 馬山主敎) 발언자로 지명되어 연설을 하셨는데 이때 교황께서 발언을 듣고 계시다가 『果是東方主敎 다웁도다. 저 김주교에게 서울대교구를 맡기리라. 데오·그라시아스』하시며 그 순간 서울의 후임대주교로 작정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先 교황 요한 23세께서 하루는 「텔레비」를 시청하고 계셨는데 측근자의 한 사람이 『성하께서는 「텔레비」를 좋와 하십니까?』고 물었다. 『좋아하지… 「텔레비」 덕분에 내가 교황노릇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말야. 그래서 내게는 텔레비가 아주 소중하지!』라고 「매스·메디아」라고 하면 大衆傳達手段이란 뜻이니 이런 의미로서는 TV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중화되고 있지 않다고 하겠지마는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視聽하고 있을뿐 아니라 멀지않은 장래에 곧 대중화될 것임을 알고 우리는 미리 여기 대한 많은 연구와 대비가 있어야 하겠다. 「매스·메디아」로서는 또 「라디오」와 아울러 신분이 있다. 신문의 위력은 대단하다. 대중의 정신과 마음을 한데 묶어 자유자재 로 움직일 수 있는 그 강대한 힘은 어떤 政治가 가히 신문을 당하리요. 따라 교회는 신학생이나 전도사 양성에 조금도 못지않게 유능한 신문인 양성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매스·메디아」는 좋은 면에서만 강력한 것이 아니다. 못된 면에서도 강대하다.
반윤리적인 것을 무슨 힘으로 T·V처럼 남의집안방 깊숙히까지 운반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겠는가? 청소년의 판단을 위태롭게 할 기사나 연재물이나 또 광고를 신문처럼 쉽게 신속하게 그리고 전국 한꺼번에 각 가정안에 집어넣을 방법이 떠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힘있는 전달방법, 이 신문을 우리가 선용하지 못하고 있다니 될 말인가? 더구나 복음전파에 이용하고 있지 못하다니 얼마나 「로마」와 호흡과 보조가 맞지 않는 이야기냐. 이렇게 강력한 힘을 믿고 신문에 종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간혹 횡포를 부리는 수가 있다. 교황청에서도 신문인들 때문에 골치를 앓는 수가 있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때만 해도 취재기자들의 활약이 대단해서 결론도 나지 않은 비밀 안건들이 모조리 事前누설되어 바오로 6세께서 부득히 발표해 버린 예도 있었다니 신문기자들 앞에는 일곱개의 쇄유로 성청의 보안조치 밀봉한 성청의 보안조치도 당할 길이 없었던가.
신문기사에 대해 제일 많이 신경을 쓰신 교황은 삐오 12세였다고 한다. 성기관지 「O·R」을 통하여 나가는 교황자신의 발언에 대하여는 특히 신경을 쓰셔서 꼭 친히 교정을 보셨다는 것이다. 요한 23세 교황하면 성청에 권위대신 인간미로 함뿍 바꾸어 놓으신, 역대교황 중 가장 온정에 넘치는 할아버지요, 평생 화를 내신 일이 없기로도 유명하신 분이었다. 이 할아버지가 신문기자한테는 화를 냈다는 이야기다.
드·골장군이 「로마」에 체류하면서 수차에 걸쳐 성하와 회담을 하고 있을 때다. 하루는 성청에서 내외 기자를 모아놓고 공식기자회견을 하는데 젊은 인태리 기자 한 사람이 프랑스공화국 대통령과의 회담한 결론부터 말하라고 따졌다.
『이사람, 자네는 아직 신출내기 기자인 모양이군. 그래 교황을 심문하는 법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니 말일세! 질문을 하는 사람이 바로 교황이니라!』 이것이 요한 23세의 대답이었다. 알현을 마칠 무렵이 교양없는 기자를 그래도 위로하시며 얼마동안 사담을 나누워 주셨다한다.
또 하루는 어떤 이태리인 기자 한 사람을 불러 놓고 지시를 하시는데 아부근성이 있는 이 기자는 알현하는 동안 성하 앞에 줄곧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일어나서 저의자에 앉게!』 『지극히 공경하올 聖下! 죄인은 이렇게 꿇고 있는 것이 더 편하옵니다. 죄인은 선교황 삐오 12세를 모실적에도 언제나 이런 자세로 있어 몸에 익었사옵니다.』 『꿇어앉는 것은 기도하기에는 좋으나 일하는 자세는 아니로다』 그래도 그 기자는 말을 듣지 않으니 성하께서는 버럭 야단을 치시며 『앉으라니까! 네가 일어나 앉지 않으면 내가 돌아가겠네!』하셨다는 이야기다.
『바티깐」은 세계의 정신을 지도하는 총산이다. 세계의 귀는 「바티깐」을 향하고 있다. 따라서 「바티깐」은 세계 각 신문의 취재 각 추장이 되어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伊太利의 「일·뗌뽀」紙하면 중립지로 유력지의 하나다. 이 신문이 교황의 주치의를 매수한 일이 있었다. 그리스도를 30은전으로 판 사람도 있었는데 의사 한 사람 매수하는 것쯤 그리 대단하랴. 더구나 거액을 받은 주치의의 할일은 간단했다. 삐오 2세 성하의 임종장면을 몰래 사진으로 찍어준다는 조건. 이 귀한 사진은 순식간에 전 세계에 팔려 전파되었다. 놀란 것은 요한 23세 즉시 감독책임자인 국무차관보인 델라꽈 대주교가 직위에서 해임되고 교황주치의는 성청에서 축출되었을뿐 아니라 이태리 의사협회에서도 제명되었다. 멜라꽈 대주교는 추기경 후보로 명단에 올라있었던 고위성직자였으니 신문기자 때문에 신세망치는 일은 성청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는 모양이다.
요한 23세와 신문기자와의 일화는 특히 많고, 신문기자들의 성가심도 역대 교황중 제일 많이 입은 교황이다. 특히 공산당들이 성청을 이용하는데 온갖 흉계를 다뤘다. 이태리의 총선거 때다. 이태리공산당원들이 단체로 교황을 알현했다.
착한 요한 23세는 그들을 맞아 반가운 나머지 『오! 사랑하는 나의 아들들아 너희들도 나의 자식들 이로라!』라고 두 팔을 열어 그들을 환영했다. 이 광경이 전공산당 기관지를 통하여 보도되었다. 대문짝만한 붉은 활자로 「교황 이태리 공산당을 지지」라고 하룻밤 사이에 공산당의 표수가 술술 올라간 것이 눈에 보인다.
다음날 記者들이 聖下께 들이닥쳤다. 23世께서는 예사로 『歷代敎皇 레오드 비오도 그리고 나 요한도 공산당을 단죄하는 데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네. 그러나 그들 공산당원, 그 인간은 역시 나의 아들들이란 말야!』라고 하셨던 것이다.
『공산당, 그들은 교회의원수로다. 그러나 교회는 원수가 없다.』 요한 23세의 유명한 말이다.
현대생활에 없지 못할이 「매스·메디아」! 여기에 우리도 인식을 새로이 하자. 그리고 우리도 「매스·콤」을 선용하자. 또 「매스·콤」의 횡포에서 우리의 가정, 우리의 자녀를 보호하자. 「매스·콤」은 「성신의 빛」도 될 수 있고 가정과 자녀를 죽이는 마음의 비수도 될 수 있다. 교회가 TV나 「라디오」 방송국을 가지고 올바른 신문을 가지자는 것도 필경은 「지상의 빛과 소금」을 주자는 것이요, 인류에게 즐거움을 주자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義務요, 敎會가 할일이다. 돈이 없어 못한다고 한다. 돈이 없어 못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었는 것이다. 우리敎會의 힘이 그처럼 약하지 않다. 교우들 중에는 사업가도 재벌도 있다. 비오 10세는 『내 목장을 팔아서라도 좋은 신문을 육성발전 시키고 싶다』고 그 기가막힌 심정을 토로하셨거늘, 우리도 『주교댁을 팔고 세단차를 처분해서라도 교회가 신문을 해야할 심정』 왜 안된단 말인가. 한국의 신자수도 이제 70만명을 돌파했다. 70만명이 모이면 나라라도 만들수 있지 않겠는가. 「매스·메디아」에 관한 교령이 발포된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는 왜아직 반영이 없느냐? 잠을 자느냐? 아침 「라디오」 소리도 신문의 「호외」 소리도 들리지 않느냐.
金達湖(本社論說委員, 慶大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