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주교님의 은퇴 소식이 전해진 어느날이다. 한 친구가 『만일에 안양 나병요양소가 없었더라면 노 주교님은 어디로 갔을가? 또 스위니 신부가 살아계셨더라도…』라는 말을 했다.
웃어넘길 말이 아니었다.
한국 안에는 고귀한 구령사업에 자기의 일생을 송두리채 바친 가난한 노인 신부, 신병으로 인해 갈 곳 없는 착한 목자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관심을 가진 사람은(신자들은 물론 성직자들까지도!) 별로 없는 것 같다.
한창 일할 수 있는 신부가 눈이 멀거나 신병중이거나 고령 노쇠한 성직자들이 서울 주변에 만도 여러분이 계신줄 안다.
세상에 썩어 없어질 재물을 모르고 하늘에만 영원한 보화를 마련한 결론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세상의 재물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아는 현명한 사람들은 또 사재의 귀함을 통감했다. 내가 병으로 누었을 때 부모가 옆에 있어줄 것인가?
처자가 있어 나를 거들어줄 것인가?
친척 동료들이 나를 도와줄 것인가?
의지할 곳 없는 나에게 어느 본당 한구석방이라도 주어지고 밥 한술 떠주는 사람이라도 있을 것인가?
교회 병원이 많으니 돈 없이 환영해주는 곳이라도 있을 것인가?
이것은 아주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항간에 떠도는 성직자들이 재물 모으는 것을 시비하기 앞서 한국교회가 해야 했을 일을 생각해야 한다.
신부들이 안심하고 본연의 그 신념과 십자가의 정신으로 젊은 정력을 사목을 위해서만 바칠 수 있고 늙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놓았는가 말이다.
그 터전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신부들의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요양소 건립과 미사를 드릴 수 없는 신병 · 노쇠한 신부들에게 연금제를 실시하는 일이다.
물론 여기에는 자금문제가 뒤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전국 신부들의 기성회비(매달 혹은 기별로) 제도를 만든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면 많은 신자들의 후원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또 이 사업은 범교회운동으로 전개해도 좋을 줄 안다.
경치좋은 산간이나 해변가에 성당 오락실 병원 식당을 갖춘 종합요양소에 독채 숙소를 마련함으로써 그들이 침식과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조용한 여생을 보내케 해야한다.
그리고 미사를 드리지 못하는 신부에게는 일정한 연금을 주어 개인 일용품 용돈에 불편이 없도록 해야한다.
그러면 이들은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고 착한 목자로서의 지난날의 공적을 나눌 수 있는 것이며 뒤를 따르는 모든 성직자들에게도 좋은 교훈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얼마전 명동성당 주보에 서울대교구의 재정난을 돕기 위해서 성금을 희사한 17명의 갸륵한 분들이 발표된 것을 보았다.
이밖에도 이런 갸륵한 분들이 신자들 중에는 적지않을 줄 믿는다.
범인(凡人)은 세상에 재산과 자식을 남기고 죽어가지만 성직자가 남긴 것은 성덕(聖德)밖에 무엇이 있는가?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남들처럼 노쇠해서 그런 불쌍한 처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교구를 초월한 전국 성직자를 위한 종합요양원의 건립은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늘에 나는 새를 보라 심고 거두지 아니하되 하늘에 계신 너희 성부 저들을 먹이시나니…』(마두 6 · 26)
『그러나 나는 지금 누울 곳이 어디 있느냐?』는 불안이 눈앞에 있다.
『너희는 부화를 하늘에 쌓으라! 대개 네 보화가 있는 곳에 곧 네 마음이 있나니…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느니라…』(마두 6, 20-24)
주의 이 말씀에 그토록 충실했던 착한 목자에게 이런 불안을 주어서야 될 말인가!
尹空(아동문학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