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달 동안에 발표된 문단작가들의 소설 속에서 종교를 소재로 한 작품을 찾아보았다. 우선 눈에 띈 것이 「신동아(新東亞)」지에 발표되 이청준(李淸俊)의 단편 행복원(幸福園)의 예수」였다.
작가 이청준은 문단의 신예(新銳)로서 차분한 필력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추구하는 한편 외부현실에 대해서도 관심어린 풍자를 던지는 작풍(作風)을 지니고 있다. 「행복원」은 어느 고아원의 이름이다. 고아원은 기독교신자인 한 젊은 여인이 경영하고 있었다. 이 고아원의 아이들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나」라는 소년은 다른 아이들이 모두 「엄마」라고 부르는 원장을 「누나」라고 부르고 싶어했다.
어느 달밝은 밤에 소년은 잠이오지 않고 오줌이 마려웠다. 처마 그림자를 따라 변소로 가고 있었다. 그때 소년은 발빛에 보얗게 알몸을 드러낸 엄마가 자꾸자꾸 몸에 물을 끼얹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누나 등밀어줘?』
소년은 저도 모르게 입밖에 그런 소리를 내어 빌고 말았다. 이것이 소년이 고아원에서 박해를 받게된 첫번째의 과오였다. 두번째의 결정적인 과오는 그로부터 얼마후의 일요일에 저질러졌다.
가끔 시내 예배당으로 주일 예배를 보러가는 엄마는 언제나 얼굴이 희고 발그레한 소년만을 손에 매달고 나서는 것이다. 그날도 바로 그런 날이었다. 엄마의 손에 이끌리는 녀석은 자랑스런듯 몇번이고 흘끔거리며 뒤를 돌아다 본다. 녀석이 무에 아쉽기나 한듯이 마지막으로 한번더 뒤를 돌아다보며 눈알을 굴렸을때 그때 소년은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녀석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움켜쥔 돌맹이로 녀석의 뒷통수를 까 주었다.
『마귀! 마귀! 네놈은 하느님도 용서 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행복원」에서 쫓겨난 소년은 물론 불행했다. 고초를 겪어 나가면서 소년은 고아원에서 익힌 기도의 은혜를 유일한 밑천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기도의 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그는 죄를 짓는다. 그리고는 기도로써 용설르 받는다. 그는 용서를 교회에 맡겨놓고 사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 어울려 지내며 또한 그들을 속여먹으면서 산다.
이제는 청년이 된 그는 군대생활까지도 그런식으로 마치고 나온다. 그는 우연히 어린 시절의 그 「행복원」엘 들렀다. 거기서 그는 어린 시절의 자기처럼 조약돌을 두손에 모아 흔든 후 한 손에 갈라쥐고 내밀면서 몇 개게?』하고 알아맞추기 놀음을 하는 아이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고아원 벽에 걸린 합장을 한 예수의 초상에서 역시 그 알아맞추기 놀음의 자세를 발견한다. 무한정 용서와 구원만을 요구하는 인간들의 농락 앞에 이제는 손에 남은 것이 없는 예수는 그 무실(無實)을 은폐하려고 막연한 어느 한점에 시선을 주고 시치미를 떼는 것 같이 보인다. 이미 손이 빈 것을 눈치 채인 딱한 예수-.
이것이 소설의 내용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코가 크고 허리띠를 마지막 구멍에서 간신히 걸어매는 서양 사람들의 메스꺼운 자선과 한 인간 - 한 소년의 진실에 통정되지 못하는 사회의 위선을 풍자하면서 아울러 오늘날 우리 사회에 있어서의 기독교적 윤리의 타락을 그리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이 진지하려면 피상적 풍자로써 그쳐서는 안된다. 거기서 더 나아가 본질적으로 납득이 있는 감동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 작가가 기독교에서 기구(祈求)의 타락을 인지(認知)했다면 가령 「자연법칙의 공평을 깨치는 이기성」 「우매한 기복(祈福)의 샤아먼」의 표출이라도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의 「플롯」 속에 의도된 「알아맞추기 놀음」의 우화는 「천국」이나 「계급없는 사회」 등 묻어 놓은 패(札)의 전제를 싫어한 지드나 까뮈의 도식을 대입한 인상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윤리적 이성으로써가 아니고 유희적 사설(辭說)로 씌었다.
이렇게 되면 작가가 주제에서 잡은 대상에 대한 애착이나 저항은 그 인식 의도와 「안티테제」의 빈약 때문에 결국 작품이 지닌 의도와 가치가 인정되기 힘들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종교를 문제삼는 문학적 노력은 차라리 본 홰퍼 유(類)의 상황윤리에라도 미쳤으면 그래도 자극적인 논의의 여지가 있겠다. 피상적 「센치멘탈리즘」이나 존재론적 「페단티즘」에 맴돌때 문제성의 농도는 희미할 따름일 것 같다.
具仲書(文學評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