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論(무신론)과 對決(대결)키 위한 하나의 神學(신학) ⑩ 六, 豫言的(예언적) 및 永世論(예언적) (終末論的(종말론적)) 肯定(긍정) (續)
敎會救世活動(교회구세활동)을 위한 原則論的(원칙론적) 假說(가설)로서
그리스도교 삶의 根本意義(근본의의)를 證言(증언) · 俱現(구현)
現代世界(현대세계)의 不條理(부조리) · 虛無(허무)에 對處(대처)해서
「意味(의미)의 선포」는 共同體(공동체(교회)로써 成就(성취)
敎會(교회)와 世界(세계)의 同一視(동일시)
批判(비판)하고 克服(극복) 돼야해
교회, 世界(세계)를 克服(극복) · 淨化(정화)하여 救援(구원)
발행일1967-08-13 [제580호, 4면]
現代世界는 偉力과 進步가 무엇인가와 마찬가지로 이 모든 進步와 偉力의 허무함(NON-SENS) 그리고 그 不條理를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역설적 狀況에 處해 있는 現代世界에 맞서 모든 實在의 최종적 의미를 선포하고 나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이다.
뽈 리껴르는 말한다 『우리는 현대세계를 점점 增大해 가는 合理化와 여기에 比例해서 만연되어가는 「不條理」 意識이라는 두 觀点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現代人들은 아마도 正義가 무엇인가를 망각하고 있는듯 하며, 그들에게는 사랑도 모자라는 것 같고, 그러나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意味」에 대한 意識이 결핍되어 있다.
우리는 오늘날 勞動의 無意味, 여가의 無意味, 性的本能의 無意味를 어디서나 直面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直面하여 우리가 해야할 急先務는 抗辯도 아니요 유감이 뜻을 表하는 것도 아니다.
告白하는 共同體가 발휘하여야 할 機能은(삶에는) 어떤 根本的意義가 있다는 것을 證言하는 일이요 이 의의를 俱現하기 위해 全力을 다하는 일이다.
여러분은 나에게 이러한 任務를 수행하는데는 꼭 그리스도교인만이 要求되는가? 하고 反問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인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重責을 수행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이 임무를 수행하여야 하는 특별한 이유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이 죽픔과 부활이 使信(메시지)은 그리스도교인을 도와 역사 안에서 無意味 이외에도 마치 剩餘分子처럼 남아있는 어떤 意味와 意義를 判讀할 수 있도록 한다. 성 바오로의 말씀대로 「죄악이 만연된 곳에 은총은 더욱 풍성하게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교인으로 남아있다는 것, 한마디로) 그리스도교인이라는 것, 그것은 (神을 除去하고 나서) 人間이 혼자 제 企劃을 구상하고 있는 그런 세계에서도 (이 은총의) 「더」 풍부함을 判讀할 줄 아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교인, 그는 곧 主潮리의 敵手요 意味의 豫言者이다.
그러나 (그는 失望끝에 發惡하는 싸움터의 마지막 敗戰兵士도 아니요. 敗訴를 豫感하고서 아우성치는 辯護士도 아니다) 그는 聖書가 선포하는 救世事件 들 안에 이 의미가 적혀 있다는 것을 承認함으로써 비로소 부조리의 적수가 될 수 있고 意味의 豫言者가 될 수 있다.』 (PAUL RICOEUR 「SCIENCES HUMAINES ET CONDITIONNEMENT DE LA FOI」 - 人文科學과 信仰의 條件(P. 142)
요지음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世俗化하여가는 이 過程이 결국에는 교회와 世界가 하나가 되어버리는 境地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실상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데, 우리는 이처럼 교회와 세계를 同一視하려는 태도를 비판하여야 하고 마침내 이를 克服하여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典禮의 共同體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자신을 세계에 분명하게 보여주되, 하느님께로부터 起源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實現된 이 그리스도교적 希望의 「메씨지」(使信)를 전달해 주는 공동체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와같이 교회는 이를 克服하고 變形하고 정화하면서 救援하여야 한다.
뽈 리꺼르는 계속해서 다름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리라는 생각은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만일 교회가 송두리채 없어져 버린다면 이 세상에는 그 이상 상실해야 할 것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세계間의 外的 辨證法的 關係가 維持되기 위하여 說敎와 禮拜는 그들의 機能을 충분히 발휘하여 (그리스도교인이 追求해 마지않는) 이 意味가 (窒息당하지 않고 오히려 언제나 生氣있게) 循環할 수 있는 어떤 內的인 터전을 항상 確保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禮拜는 아주 특수한 行動이요 말씀을 감싸고 있는 하나의 實踐(PRAXIS)으로서 그것은 벌써(例컨대 맑스가 말하는 意味의) 「功利的」인 行動도 아니며 그것은 또한 社會的인 행동도 아니고 경제적(即 生産的)인 행동도 아니고 技術的 행동도 아니다.
人間은 이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거기 展開되는 어떤 「몸짓」(GESTE)의 象徵을 통해서 말씀의 象徵을 生活하게 된다. 이곳이야말로 하나의 「우리」가 처음으로 일어 오르는 곳이요 또한 끊임없이 다시 일어오르는 곳이다.』 (P. RICOEUR 人文科學과 信仰의 條件 P. 142)
禮拜는 信仰의 증거 이상의 어떤 뜻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배가 신앙의 증거임에는 틀림없다. 예배에서 하느님을 肯定하고 그분의 使信을 宣布하여야 하는 敎會의 이 使徒的 使命이야말로 그리스도교적 使信의 심장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그런 것으로 永久히 남아있을 것이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