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宗敎觀(종교관)] ⑦ 生活(생활)과 並存(병존)하는 실천력 돼야
육체와 더불어 쇠퇴하는 정신의 뒷받침되는 힘 아쉬워
발행일1968-05-26 [제620호, 8면]
어려서부터 유가의 가문에서 자라난 나는 「冬溫而夏情」하며 出必告反必面해야된다는 父母님의 깊은 뜻을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겉으로는 그지없이 엄격하시기만했던 부친의 儒家特有의 訓育과 영향을 받아 자랐고 그것이 60년의 나의 생애를 살아오는데 있어 생활과 思考의 根幹을 이루어 온 것이 또한 사실이다.
20세기 초엽 세계1차 대전을 전·후하여 이 땅에도 개화사조가 물밀듯 밀려오고 강대국의 침략에 국운은 일로 망국의 길로 줄다름쳐 암담을 극했던 나의 젊은시절은 신구사조의 어지러운 혼미속에서 당시 젊은이들은 종교면에서도 고래로 이어받은 유불교에서 신문화의 바탕을 이루던 기독교의 새로운 교리에 호기의 눈과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많았다. 나도 20세시에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친우 梁珍鴻군의 권유에 따라 당시 蓮建洞에 있던 기일牧師(처음으로 韓英辭典을 발간한분)의 연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가의 집안에 태어났던 탓인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생활과 사고면에 기독의 교리서를 받아들임에 있어 유교적 사고방식을 탈피치 못하는 모순을 자인케 됨으로써 어느새 교회의 문에서 스스로 이탈하여 살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近代에 와서 학자들간에는 종교관에 대한 定義設定을 企圖함에 있어 종교를 知性活動의 所産으로 보는 헤-겔的 見解-즉 有陙者의 정신이 無限의 神的精神을 認知하는 과정이라 보는 主知主義的인 종교관과 이와 대치적인 見解로 종교란 알고저 하는 순수한 충동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고 다만 신에 대한 絶對歸依의 감정에서만 비로소 成立된다고 보는 感情主義的 종교관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종교관을 知 情 意의 心的활동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도리여 이런 內的意識과 함께 표현되는 外的行動에 中心을 두고 여기에 종교의 晶體를 認定하려는 行動主義的 종교관이 그것이다.
이 행동주의적 종교관은 學的으로 극히 우세하였었고 그리하여 종교로서의 행동주의란 어떤 것이냐를 한정짓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목적과 대상 및 形式 機能등에 대한 限定方式이 다름으로 해서 이 宗敎觀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見解가 엇갈리게 된 것이었다.
即 道德的義務 다시 말해서 人間이 그 個個의 慾望을 누르고 愛情으로서 社會的으로 團結을 圖謀하는데 宗敎가 있다고 보는 道德主義宗敎觀과 單純히 宗敎를 災難을 救하고 有和圖謀의 手段으로 본다든지 恩惠增進의 수단으로 보는 宗敎觀이나, 宗教를 自己生存의 行動形式의 하나로 보고 그러기 위해 무엇인가 超自然的힘에 기대여 보려는 것이기 때문에 實利的動機를 떠나서는 人格的인 어떤 힘이나 他人을 위해 行하는 行動은 宗敎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보는 功利主義的 宗敎觀 등이 그 代表的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종교관은 그 모두가 충분히 그럴만한 근거가 있음을 수긍하는 바이지만 한편 그 일방에는 지나치게 종교의 부분적 특성에만 치우친 나머지 전체적인 종교 그 자체를 표현하기엔 어딘지 석연치 않음을 느끼게 된다.
나의 경우 종교란 실제에 있어 일상인간생활의 모든 부문에 함께 존재하고 모든 방면에 함께 활동하며 함께 호흡해야 하며 결코 종교를 생활과 분리한 특수행동이나 특수생활에 국한하여 그곳에서 종교관을 세우려는 것은 그릇된 출발이 아닐까 한다. 나도 이제 耳順의 고개에서 저물어가는 인생의 황혼을 당하여 간혹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대하게되고 황량한 무덤의 피안을 연상하게 될 때에 육체와 함께 쇠퇴해가는 정신력을 받쳐줄 그 어떤 힘에 歸依하고픈 충동이 간절할 때가 있다.
가까운 몇몇 親友들 중에 혹은 가톨릭에 혹은 佛敎에 혹은 기독교에 독실한 信者가 있이 各己 나에게 권유도하여 오고 스스로 敎會의 門을 두드려 보기도 하지만 아직 어느 宗敎에도 歸依하지 못한 것은 스스로의 生活惰性 確固한 宗敎觀의 缺如에 起因하는 듯하여 더욱 서글퍼지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