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14) <第一話(제1화)> 나를 만나보시려면 ⑭
발행일1968-05-26 [제620호, 8면]
『은희!』
하고 소리치려했으나 가슴이 꽉 막히고 혀가 얼어붙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왜 그래?』
아들이 승재의 팔을 잡으며 근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저기 저기…』
『어디 무어?』
둘이서 함께 오른편 창문을 바라보았으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거기 무엇이 있다고 그래?』
『아니다. 내가 정신이 얼떨떨해서 잘못 보았나보다』
『아버지 아직도 아픈가봐. 이제 그만 집으로가』
『그래 가자.』
승재는 아들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이 아득하고 다리가 휘청거리었다. 성당안은 캄캄한데 마당에 켜놓은 외등 빛이 창을 비치고 있었다.
『얘, 인제 나오니. 참 오래 있다가 나오는 구나.』
둘이서 성당문을 나섰을 때 어디선가 순녀가 뛰어나와 아들에게로 닥아 왔다.
『너 여기 웬일이냐?』
승재가 물었다.
『엄마하고 신부님한테 왔다가 아저씨가 성당에 들어가시는걸 보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응? 엄마하고?』
(그랬구나. 정옥이었구나. 정옥이가 들여다보고 있었구나.)
승재는 이렇게 생각하며 공연히 마음이 허전하였다. 물론 은희가 나타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어리석은 생각을 할 나는 아니다. 흥!)
승재는 이렇게 다짐하였다. 그리고 입가에 그 증거로 차거운 웃음을 띄었다. 그러나 허전해지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승재는 휘청거리는 다리를 지탱하느라고 잠시 벽에 기대어 섰다.
『성당에 오셨군요.』
정옥이가 나타나서 은근한 미소로 맞이해 주었다. 승재는 굶주린 시선으로 정옥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아니다. 아까 그 여인은 분명히 흰옷 차림이었다. 그런데 정옥은 저렇게 색깔이 있는 옷이 아닌가. 아니다. 정옥이는 아니다.)
승재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온몸에 가벼운 전률을 느끼었다.
(색갈이 있는 옷이 어둠속에서 잘못 보이었는가? 그럴 리가 없다. 분명히 그럴 리가 없다. 아까 그 여인은 흰옷이었다)
『몸은 좀 어떻세요?』
정옥이가 근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승재는 벽에 기대었던 몸을 떼며 힘있게 말하였다.
『애들아, 너희들 먼저 집으로 가거라. 나는 아저씨께 드릴 말씀이 있다.』
『네.』
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경주를 하여 집편으로 달려갔다.
『나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아이들이 사라진 후에 승재가 물었다. 승재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정은이가 할 말을 짐작하고 있었다.
『네.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요.』
정옥은 또박또박 잘라서 대답하였다.
『그럼 잠시 어디로 가볼가?』
『아니어요. 집으로 천천이 걸어가면서 말씀드리지요.』
『그럼 이리로 해서 천천히 걸어가지요.』
『네.』
두 사람은 성당 뒷문으로 나왔다. 거기서는 집으로 가는 호젓한 길이 있었다. 산등성이를 비스듬이 넘어가는 길아닌 길이었다. 날은 어두었으나 여기 저기 불이 비치어 훤하게 길이 보이었다.
『무슨 말씀이시지요?』
『사실은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일인데, 그동안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네. 알고 있읍니다. 다잘 알고 있읍니다.』
승재는 정옥의 말을 가로채어서 말하였다.
『네? 잘 알고 계셨다고요?』
정옥은 눈이 둥그래서 승재를 쳐다보았다.
『시골로 가시려고 그러는 거지요. 그동안 못가신 것은 죽은 은희의 유언 때문이었지요. 그렇지만 이제는 유언을 전했으니까 시골로 가시려는 거지요?』
『네. 그거에요. 그동안 괴로울때도 많았어요. 그렇지만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죽은 글라라의 유언을 저버릴 수는 없었요.』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없이 걸었다. 어느 틈에 산등성이에 오르고 있었다. 멀리 서울의 휘황한 불빛이 한 눈에 바라보이었다.
『정옥씨 정옥씨의 말씀은 잘 알겠읍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내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읍니까?』
『네. 말씀 하세요.』
승재는 잠시 입을 다물고 걷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가실 생각마시고 저의 집에서 한평생 함께 지내실 수는 없겠읍니까? 뻔뻔스러운 말씀이지마는 순녀는 친딸처럼 키우겠읍니다.』
정옥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저는 이미 이 세상에 관심이 적어요. 나머지 생애는 오직 내세만을 위해서 살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김 선생님은 제 생각은 마시고 앞길을 열어 가도록 하세요.』
『그 말씀은 절대적 입니까? 어떻게 마음을 돌리실 수는 없을까요?』
『절대적이어요. 저의 길은 하나 밖에 없어요.』
두 사람은 언덕길을 내려와서 이미 집이 보이는 지점에 이르렀다.
이튿날 정옥은 시골로 내려가는 버스를 탔다. 정류장에는 승재가 아이들을 데리고 배웅을 나갔다.
『선생님, 애 엄마 유언에서 덜 말씀드린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애 엄마는 선생님이 성당에 나오신다고 금새 만나지는 못할거라고 그랬어요. 꾸준히 다니시면 어느 때고 만나게 될 거라구요, 다시 말하면 믿음이 생기셔야 한다는 말씀이겠지요.』
버스가 떠났다. 정옥이 모녀도 손을 흔들고 승재도 아이들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버스는 먼지를 일으키며 한없이 뻗은 곧은 길로 가물가물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