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世紀(세기)를 照鑑(조감)한 아데나워 自敍錄(자서록)
將來(장래) 鬪爭理念(투쟁이념) 바뀌어
展望(전망) 基督敎(기독교) · 物質(물질) 代決(대결)
歷辭照鑑課程(역사조감과정)서 「反省(반성)」은 要諦(요체)
나는 「善(선)」을 보아온 最後(최후)의 사람
『인류는 늘 생각코 끊임없이 그리고 피곤을 모르고 앞으로 전진해 나가야만 한다』(本文에서)
■ 過去를 龜鑑삼아
來日은 오늘 위에 세워진다 이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은 어제에 그 기반을 둔 것이다. 이 세상엔 이 진리를 且置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들은 자신에 관해서만 반성할 것이 아니라 장래에 있어서와 같이 지난날의 인류문화사에도 무엇이 가로 놓여 있는가를 반성해야 한다.
그러므로써 성취할 수 있는 우리들의 영적인 성장을 높이 평가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다만 그는 인간이라고 불려질 가치있는 生, 또 그만큼 보상을 받게될 良心的인 生을 이끄러 왔다.
만약 사람이 반성하지 아니하면 자신의 개성은 물론 자기자신의 生命까지도 저바리게 되고, 바람에 목적없이 흔들리는 나무잎 같이 흔들려 드디어는 어디론가 멀리 흘러가 버리고 만다.
우리의 비평세대에도 확실히 善과 美 그리고 정직한 노력과 사업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은 희미하게 나타나고 또 어떤 것은 그것이 없이는 인류가 진실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다.
과거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지금 우리들에겐 나타나지 않고 있다. - 영적인 질서 말이다.
이것은 지난날의 역사적인 가치성을 논구할 때 내가 생각한 것이다.
만약 영적인 질서 혹은 균형이 상실되고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영적인 힘은 안이해지고 조용해지고 어이없는 만족에 떨어지게 된다.
난 과거에 살아온 여러 많은 친구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온 유일한 사람이며 그 가운데서 오즉 善만을 보아온 最後의 사람이다.
인류는 늘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며 끊임없이 그리고 피곤을 모르고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 나가야 한다.
나의 父親은 어릴적부터 내 心中에 이것을 길러왔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父母任들은 그들의 子女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 세대의 위기를 보지 않을 수 없고 우리가 이 地上에서 정령하고 있는 이 時代는 과거로부터 온 善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된다. 靈的인 질서란 과거의 여러가지 善한 일에 속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 정신적인 特性을 發展시켜왔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확신과 인내를 혼란과 매혹적인 시대를 이겨내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영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 善과 惡
『난 진실로 영적인 질서로써 무엇을 할 것인가?』하고 당신들은 스스로 물어본 일이 있는가?
난 지금 그것을 한말로 대답해 보려 한다. 善과 惡을 구별할 수 있고 善에 充實하는데 끝까지 남아 있겠다고 절대적인 결심을 한 사람은 영적인 질서의 소유자이다. 最近의 몇해 동안에 全世界를 흔들고 있는 투쟁은 지난 세기의 民族的인 전쟁과는 비교될 수도 없다.
그때의 전쟁은 민족적인 주권의 영역을 넓이는데 언제나 그 목적이 있었다.
난 장래엔 이같은 「타잎」 의 전행이 크게 발생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늘의 세대에 있어서의 巨大한 투쟁이란 영토지배에 있지않고 결국 개인의 자유에 입각한 크리스찬적인 이념 위에 세워진 민주주의 및 개인의 자유와 어느 특정 집단의 부수조건으로 전락되는 물질주의적 개념, 이 두 이념 사이의 서로 다르고 반대되는 생활방식의 충돌이다.
이들 집단주의의 개념은 그들이 혹은 민족적인 社會主義라 부르는 혹은 공산주의라 부르는 관계없이 사실상 물질주의에 그 뿌리를 둔 관계로 언젠가는 하기 싫어도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투쟁은 지금 全世界에 만연되어 있다. 「유롭」 특히 독일은 이 충돌의 초점에 놓여 있다.
이것은 금후 수년동안 계속될 투쟁이며 내 견해로는 크리스찬 이념이 최후의 승리를 가져오리라는데 근본을 둔 사상이 인류의 가슴 속에 충일되지 않는다면 이 세계 인류의 平和와 자유는 아무래도 성취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오늘도 계속되는 세계 분쟁은 사실상 「크리스찬니즘」과 「콤뮤니즘」 분쟁인 것이다. (계속)
裵永根 神父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