刷新(쇄신)하는 敎會(교회)의 本堂(본당)이란 무엇 ①
바른 槪念(개념) 信者集團(신자집단)과 牧者(목자)
聖堂(성당)·司祭舘(사제관)·修道院(수도원)아닌
人間味(인간미) 充溢(충일)한 共同體(공동체)
世上(세상)흐름 吾不關(오부관)인「빈집」
信者(신자)의 來住(내주)드문 神父(신부)의 집
食料品店(식료품점)같은 信仰(신앙) 給油所(급유소)
클수록 意義(의의) 상실한 公會堂(공회당)
법적으로 볼 때 본당이란 한 신자집단이었고 그 집단을 위해 주교가 임명한 목자로 이뤄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본당은 성당·건물·사제관·수도원·학교·교회단체·청년단체·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주일미사에 참여하여 연보통에 돈을 넣는 것 등으로 생각 키우는 곳이다.
비판적인 사람들은 본당을 또 다른 모양으로 보고 있다. 화란의 故 윌헴·베커 주교는 『본당이란 것은 평일에는 성당이 텅비는 곳이고 사제관은 낮으로 비어있는 곳이며 학교는 저녁에 비어있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데니스·기니 신부는 본당을 『평신자는 내쫓고 신부들만 맞아들이는 아성(牙城)』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력과 자원을 소모시키는 폐쇄적인 가톨릭 사회의 촛점이 되는 문제점이다. 한편 신자대중은 자기들의 가난문제와 인종분규로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본당을 하나의 급유소(給油所)에 비유한다. 가톨릭신자들은 매주 자신들의 영신적인 기름통을 채우려 성당을 간다. 따라서 본당은 마치 식료품점처럼 비인격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말하자면 너는 그곳에 가서 네 것을 찾고는 싹 돌아가라는 식이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 커서 비인격적인 본당은 결코 참된 본당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불평한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본당은 공동체의 의의를 지녀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미국 「오클라호마」시에서 실험적으로 설정한 한 본당의 주임인 윌리암·네린 신부는 본당이 참된 그리스도교적 공동체가 되기 위한 조건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①본당신자들은 신자서 서로서로를 깊이 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알고 있어야 한다.
②그들은 상호 연결 관계를 느껴야한다.
③각자가 그 집단 내에서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느껴야 한다.
④주일 모임에 있어서 상호간에 참된 인간적 교통(交通)이 있어야 한다.
⑤만일 한사람의 본당신자가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는 그 집단 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방해를 주었다는 일종의 죄의식을 느껴야 한다.
⑥공동목적과 공동목표가 있어야하며 이 목적과 목표는 단순히 구성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공동체 전체의 공익(公益)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⑦본당신자수는 여섯 혹은 일곱 가정이나 15명 또는 16명을 넘어야 한다. 본당은 작은 집단이 너무 친근해져서 자기들만 뭉쳐 배타적인 성격을 띠지 않을 만큼 커야 한다. 그러나 본당이 너무 커서 본당신자들이 서로 알아 볼 수 없고 단체에 대한 책임의식을 잃어서도 안된다. 오늘날 많은 본당에서는 신자들간에 인간적인 상종과 상호접촉이 거의 없다. 수백명의 신자들이 바쁘게 드나들고 있으나 서로 말을 건네는 일조차 없다. 미국 「어터랜터」의 할리난 대주교는 최근 볼모양없이 낙후한 본당들의 구제책을 위해 원인을 지적,『신자상호간의 가장 가까운 접촉은 주차장에서 차체(車體)를 스쳐지나가는 정도』이라고 말했다. 「인간관계의 활기」라는 책자는 다니엘·칼라한 이 본당을 연구한 보고서이다. 오늘날의 도시본당에는 많은 비인간적 요소가 있다고 보고 있는 그는 『성직자들의 고식적(고息的) 부성주의(父性主義)와 평신자의 파벌, 공동체없는 전례, 너무 큰 건물들은 인간을 질식 시킨다.
오로지 인간을 살리는 것은 사람들 서로를 접촉시켜 한 덩어리가 되게하고, 그들의 재질과 능력을 찾아내어 그들을 발전시켜 주며 모든 이가 다른 사람에게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 요즘 일반본당에서는 이같은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피력했다.
그리스도교신자들은 본당 공동체에서부터 시작되어 거기서 교육되고 힘을 얻고 자극되고 보강되어 온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프란치스꼬회의 사회학자 드락스틴은 그리스도교 신자공동체는 『인간을 발전시키는 발사대이지 격납고(格納庫)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본당은 이웃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이다. 그는 두·세사람이라도 그의 이름으로 모여 서로 사랑하고 세상에 봉사한다면 바로 그 가운데 계신다. 본당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백성이다.
압도적인 다수의 가톨릭신자들이 교회와 접촉하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본당이다. 그들은 본당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찾아 얻게 된다. 그러나 오늘의 본당은 큰 난관에 봉착해 있다. 이는 본당의 조직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의견이다.
예컨데 「오하이오」의 무씨오 주교는 『본당이 절망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에 완전히 또한 근본적으로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만약 어떤 교회지도자가 전통적인 기구(機構)만을 신성시하는 것을 타파하려 하지 않는다면 사태는 비판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고 지적했고 「오클라호마」의 빅토·리드 주교는 『낙관적으로 봐주더라도 본당은 숨져가고 있다』고 말한바 있다.
사회학에 저명한 미국의 아오구스다 수녀는 미국 「보스턴」교구가 가끔 발표한 인종문제에 관한 사회정의와 빈곤에 관한 훌륭한 개혁안을 발표하면서도 본당운영계획은 완고한 전통사상을 고수한다고 했다.
그것은 교회가 평신자를 양처럼 생각하는 것, 교회 내에서만 존경받는 사도직으로 고정시켜 둔 것 등이다.
동 수녀는 결론적으로 본당은 교회 내에서 변천에 대해 가장 잘 버티어 내는 기구이고 꼭대기서 밑바닥까지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했다.
논설가 기니 신부는 본당의 근본적 개혁을 시급히 강조하면서 시간의 흐름이 너무나 빠른 것을 유의하도록 경고했다.
본당이 크리스찬의 형제적 모임이고 사랑과 경신과 봉사의 공동체라는 신심이라고 서술한 말을 생각할 때마다 거리의 구체적인 다른 현상들을 볼 때 마음은 다급해 진다고 했다.
성인 술라따는 혼자서 예언적 판단을 묵상했으나 내일의 세계를 이룩하는 데는 거의 생각지 않고 공동성 보다는 개인 신심을 더 많이 생각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여러 학자들은 본당 개혁과 교구기구의 근본적 개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글에서 앞으로 세가지점, 즉 첫째 본당의 역사적 변천, 둘째 오늘날의 본당이 당면한 제문제, 세째 내일의 본당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