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 트럭」에 발동이 걸린 시간은 정오가 다 되었을 무렵이다. 무슨 짐이 그리 많아지는지, 나중에는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다 싣기는 실었다.
장마가 가신뒤라 길은 파인채 거친 그대로였다. 왈그락, 달그락 「트럭」은 강뚝을 달렸다. 한남동(서울 용산구) 강뚝에서 바라보면 바로 저기인데 「트럭」으로 가는 길은 퍽으나 멀었다. 철교를 건너,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포플러」가 일렬종대로 사열을 한다. 멀리서 보는 「포플러」는 반짝 반짝 눈이 부시다. 잎사귀들에 미끌어지는 햇갈이겠지. 우리는 그런데서 「트럭」을 멈추었다. 나룻배를 타고 온 회원들은 어느새 질펀히 누워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텐트」를 치는 작업이다. 체력대로 작업은 분업화되었다. 약질들은 솥을 걸고 주방을 꾸미는 일을 맡았다. 어떻게나 손이 척척 들어맞았던지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좋다. 논다는 생각은 사람을 그렇게 유쾌하게 그리고 티없이 만들어 준다.
날이 저물기도 전에 「뉴먼 클럽 타운」이 건설되었다. 저마나 주방 당번을 하겠다는 문제만 해결되면 식사시간이다. 「메뉴」랄게 없다. 「캐비츠」국에 「마거린 바터」를 듬뿍 넣어서 부식으로 그리고 밥한그릇. 그래도 게걸스럽게 『밥 밥』들 한다. 저녁시간이 좀 늦어진 탓도 있지만, 야단한 요리솜씨는 태고적 식욕을 돋우어주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강변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휴가를 즐긴다』는 의미는 사실 『피서를 다녀온다』는 뜻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매일 읽기를 강요당하는 신문과 그 현상들이 주는 압박감과, 무엇을 집요하게 생각하며 또한 줄곧 풀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얼마나 질식시키고 있는가. 때로는 시계를 부셔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옷의 마지막 단추를 잠그는 일까지 싫어질 때가 있다.
「캠프」촌에는 그런 것이 없다. 누구와의 약속을 지켜도 좋고 안지켜도 좋다. 떠들기 싫으면 혼자 저만큼 떨어져 있으면 된다. 아무렇게나 뒹굴어 있어도 누가 발길로 차지 않는다. 태양만으로 오늘을 살 수 있다. 그까진 「뉴스」는 차차 알고 지내자 옷의 단추를 끼울 수도, 안끼울 수도 있다.
「트랜지스터」의 「다이얼」은 끄고 싶을 때 끈다. 인간은 날로 인간의 시간을 잃고 산다.
그것에서의 해방은 잠시나마 귀화(歸化)의 느낌마저 준다.
새벽의 제대(祭臺) 강바람에 날아갈가봐 제대에는 조약돌을 드문드문 올려놓았다. 이름없는 꽃들을 「사이다」병에 꽃아 놓는다. 제의가 펄럭펄럭한다. 제대를 꾸며 놓은 「테이블」의 몰골하며-.
그러나 우리의 기구는 분심에 차있지 않다. 들에 핀 꽃처럼 모두들 소박한 마음으로 눈을 감는다. 야전(野戰) 지대의 풍경같은 제대. 오히려 그것은 더 감동작이고 신선하다. 손때묻은 장식이 없고 사치한 꾸밈의 심정이 없다. 성당에 가는 것이 하나의 사치일 때도 있다. 성가를 들으며, 잘 장식된 제대를 보며. 적어도 강변에 차려진 제대에는 그런 것이 없다. 사람들은 수극하고 모두들 성실하게 사는 문제, 양심의 문제, 나의 문제들을 진실하게 반성한다. 제대를 감상하며 한눈을 파는 일은 없다.
나에게 또 그런 여름이 주어진다면 나는 K신부를 모시고, 어느 강변의 모래 위에서 다시 그렇게 절실하고 신선했던 미사참례를 하고 싶다. 「유급휴가」는 아직 소문뿐이다.
崔鍾律(中央日報 文化部 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