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論(무신론)과 對決(대결)키 위한 하나의 神學(신학) (完) "結論(결론)” 救世神秘(구세신비)
敎會救世活動(교회구세활동)을 위한 原則論的(원칙론적) 假說(가설)로서
現代人(현대인) 人間(인간)의 偉大(위대) · 責任(책임) 肯定(긍정)으로 福音(복음)의 窮極目標(궁극목표)인 救援(구원) 거부
「救援(구원)」=東洋思考(동양사고)로도 연구돼야
죽음 · 고통 메우기 위한 補充物(보충물)로 그릇 紹介(소개)
발행일1967-08-20 [제581호, 4면]
無神論에 接近하여 그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려는 이 두가지 방법 즉 福音의 준비와 그 豫言的宣布는 둘 다 꼭같은 重要性을 띄고있다. 이 두 접근방법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전한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는 이 두 방법이 어느 목표를 향해서 폭주하고 있는가를 마지막으로 論及하여야 한다.
이 目標는 바로 다름아닌 救世神秘이다. 이 신비야 말로 우리가 대하는 가장 중추적 實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現代人이란 대개는 구원이 필요치 않다고 宣言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 「不必要性」이야말로 그 자신의 偉大함과 그 자신의 責任을 에누리 없이 肯定하기 위한 前提요 根據라고 생각하고 있다.
동시에 現代人은 그 自身의 全歷史가 소리높이 외치고 있는 바와 같이 어떤 救援, 어떤 意義, 어떤 根本的인 意味를 누구보다도 切實하게 必要로 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가 이렇게 구원을 拒否하기에까지 이르게 된 데는 여러가지 誤解도 많이 作用하고 있다. 救援을 拒否하는 사람들은(너무나도) 흔히 이 구원을 願하지도 않은, 달갑지 않은 膳物로 생각하고 있으니 이 선물을 받은 사람의 노예상태와 被動性을 暗暗裡에 承認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膳物인만큼 이러한 선물을 받는다는 것을 하나의 屈辱으로 느끼고 있다.
이 救援을 믿는 사람들도 흔히는 이 구원을 죽음과 苦痛의 深淵을 메우기 위한 補充物로 不知不識間에 紹介하는 수가 많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교는 앙리 베륵송(H. BERGSON)이 「倫理와 宗敎의 두 源泉」 (LES DUEX SOURCES DE LA MORALE ET DELA RELIGION_)이라는 그의 著書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나의 閉鎖된 倫理 · 停體된 宗敎로 轉落하고 만다.
오늘날 우리가 무엇보다도 이 「救援」이라는 槪念을 깊이 硏究하여야 할 터무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개념을 연구하고 거기에 대한 우리의 理解를 점점더 깊이 할 수 있는 길은 여러가지가 있다.
가령 聖書學的 敎父學的 典禮的硏究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이 구원이라는 개념을 現象學的 · 心理學的 · 哲學的으로도 연구하여야 한다. 또한 이 개념을 「西洋的」 범주에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敎 아닌 다른 宗敎들로부터 출발하여 「東洋的」 思考方式을 따라서도 연구하여야 한다.
救世神秘! 그것은 감추어진 實在인 동시에 하나의 歷史 안에 또한 이 역사의 사건들 안에 활짝 제쳐지고 手交된 實在라는 두 가지 뜻을 갖는 神秘이다.
예루살렘에 設立된 「敎會再一致硏究所」는, 바로 이와같은 救世神秘라는 實在를 中心으로 그 硏究의 向方을 잡아가고 있다. 여기에서는 敎派가 서로 다른 교수들과 많은 硏究家들이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展望」을 내다 보며 이렇게 努力하는 이 敎會再一致運動을 또한 우리의 과거를 「回顧」하고 우리가 서로 갈라져야만 했던 原因들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도 결코 소홀이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단체도 역시 하나의 信仰告白하는 共同體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祈禱와 眞理探求는 結合되어야 한다.
예루살렘! 그곳은 옛날과 같이 오늘날에도 새 유데아, 새 사마리아 地上의 새 극변에 이르기까지 뻗어 나갈 새로운 宣敎의 産地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