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放送(방송) 對談(대담)] 옛날의 그 모습 종현(명동)성당
내외 하노라 男女席(남녀석) 사이에 벽 세우고
대원군은 사람 많이 죽이기로 세계 3째
聖鍾(성종), 大東亞(대동아)전쟁때 대포껍질 될번
이글은 「홍보의 날」 행사 중의 하나로 오기선 신부와 극작가 이서구(요셉)씨가 지난 5월 3일부터 9일까지 7일간 동양방송에서 매일 아침 6시 10분부터 20분까지 10분간 방송된 「내가 만나보고 싶은 사람」 시간에 대답한 것 중인데, 그 몇가지를 추려 싣는다.(편집자)
李=신부님 안녕하십니까? 요지음 서울교구에 교구장을 비롯하여 변하는 것이 많습니다. 평소에 제가 존경하는 신부님을 모시고 명칭이 여러가지인 종현(명동)성당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습니다.
吳=명동성당을 옛날엔 종현성당이라고 했는데 종을 단 언덕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 같습니다. 이조 태조가 연고(民聲函)를 만들어 놓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사연을 적고 북을 치게 했으며 또 임진왜란 때 명나라 양현 장군은 지금의 남대문에 있었던 종을 떼어다 이 언덕에 달아놓고 조석으로 군사를 모을때 이 종을 쳤기 때문에 종현이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대원군은 약1백년 동안 2만여명의 가톨릭신자들을 학살했잖습니까? 대원군은 전 세계에서 세번째로 사람을 많이 죽였답니다. 첫째는 네로 황제 둘째는 월남민만이라는 사람이래요.
李=불명예스러운 3등이군요. 종현성당을 지은 때는 언젭니까?
吳=네, 윤선도(尹善道)라는 사람의 집터였던 이 언덕을 1883년 10월 백 주교님과 고 신부가 매입해 우선 학당을 지었다가 후에 성당을 지으려고 할때 조명식이란 대신이 성당을 못짓게 하려고 토지매매계약서를 먹글씨로 조작했읍니다. 교회 측에서 매입하지 않은 것처럼…
李=못짓게 하는 이유는 대궐보다 높은 위치기 때문입니까?
吳=물론이지요. 모든 건물들은 대궐보다 낮은 위치에서 대궐을 올려다봐야 하는데 달갑게 생각지도 않는 교당을 대궐 건너편 높은 언덕에다가 짓는다는 건 천부당 만부담 한 말이지요. 불란서 뽀아넬(박신부 다음 종현당을 지킨 분) 신부가 먹글씨로 조작된 토지매입서를 침으로 문질렀더니 문서를 조작한 것이 발각 되었어요.
李=먹글씨는 쓴지가 얼마 안되어 쉽게 지워지고 그 밑에 쓴 원래의 글씨는 오래된 것이라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보였군요.
吳=그래서 다행히 1892년 8월에 기공해서 98년 5월 29일 축성식을 했죠. 그런데 그때 성당 옆엔 영희전(永희전)이 있었다더군요.
李=그랬읍니다. 지금중부서 자리부터 명동성당 부근까지 일대가 모두 영희전이 였읍니다. 왕들의 영혼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곳에 엉뚱한 교당을 지었으니 당시엔 정배 아니면 목달아날 것이지요. 그리고 태평양 전쟁때도 종현성당은 또 수난을 겪었지요?
吳=네 그 수난도 기가 맥힌데 그것은 내가 직접 당했읍니다. 1941년부터 2년간(원 주교·노 주교 비서로 있었다) 종현성당에 있었는데 포 총 껍질을 만든다고 종을 뺏으려 일본군인이 왔더군요. 그래서 나는 『종을 뗄라면 종각전부를 헐어야 하는데 만일 저 뾰죽한 고전 건물을 헐어 버리면 일본 천황폐하께 큰 수치스러운 일이니 헐고 종을 떼어 갈려면 또 고대로 지어 놓아야한다』고 본의 아닌 거짓말을 했지요. 그랬더니 그냥 가버리더군요. 그래서 거짓말 덕분에 지금 명동성당 종각이 보존되었읍니다.
李=신부님의 지혜가 아니였더면 큰일날번 했군요.
吳=18.15 해방때 명동성당 종이 올릴때 서울장안 모든 사람들은 희비에 얽힌 이 종의 소리를 듣고 웃고 울고 야단 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