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15) <第二話(제2화)> 榮光(영광)의 敗北(패북) ①
발행일1968-06-02 [제621호, 4면]
동서무역회사(東西貿易會社) 사장, 필립·윤(尹)은 사장실 쏘파에 앉아서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었다. 창밖에는 첫여름 오후의 눈부신 햇빛을 안고 우람스러운 남산이 우뚝서 있었다. 그 산마루로 두대의 케불카가 서로 엇갈리며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는 것이 손에 잡힐듯이 내어다 보였다.
남산이란 참으로 이상한 산이었다. 가만이 보면 뭉툭하고 두리뭉실하게 생긴 것이 볼품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산이 또 무진장의 큰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윤 사장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두달전까지 그것을 혀를 깨물며 느꼈던 것이다. 그는 거의 이십여년을 동남아세아로 전전하였다. 홍콩, 마카오, 필립핀, 싱가폴 등지를 돌며 눈코 뜰사이 없이 분망한 가운데 이십여년이란 세월을 보낸 결과 상당한 자본과 담력과 상업수완을 터득하였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문득 문득 뼈저리게 그리운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곧 서울이고 남산이었다. 그리하여 회사 사옥도 남산이 바라보이는 건물을 택했고 더욱이나 사장실은 정면으로 남산이 바라보이는 방으로 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벌써 외국으로부터 귀국한지 두달이나 되건만 아직도 남산을 바라볼때 꼭 꿈속에서 보는 것처럼 새로웠다.
조국과 고향이란 것은 참으로 이상한 매력을 가진 곳이다. 윤 사장은 한가할 때면 새삼스럽게 창너머로 그 멋없이 봉긋하게 앞에 가로 놓인 남산을 바라보며 이런 감회를 막을 길이 없었다. 윤 사장은 유유 담배 한 개를 피어 물었다. 그리고는 허공으로 길게 흰 연기를 내어 뿜었다. 그러나 순간, 윤 사장의 얼굴에는 우울한 표정이 뒤 덮이었다. 벌써 오십이 바로 눈 앞에 닿은 그는 귀밑이며 정수리며 할 것 없이 희끗희끗 머리에 여기 저기 은빛이 번쩍인다.
뿐만 아니라 얼굴은 탄력을 잃었고 볼과 눈등에는 검은 그늘이 져서 인생의 내림길에 들어선 것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뒤덮은 우울은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닌것 같았다. 그는 잠시 무료히 앉아 있는 동안에도 상을 찡그리고 어깨가 가볍게 들먹이었다. 피로한 빛이 완연하였다. 똑똑 노크소리가 났다.
『들어 와요?』
윤 사장은 자세를 바로 잡으며 점잖게 대답하였다. 키가 작달막하고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서무과장이 생글 생글 웃으며 들어서서 허리를 굽신하였다.
『사장님, 회의실로 가시지요. 모두 기다립니다.』
『응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중역회의 까지 한 시간을 남산이나 바라보면서 한가로이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 한 시간이 너무도 빨리 가버린 것이었다. 윤 사장은 곧 회의실로 갔다. 중역과 부장급 이상의 간부직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모두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였다. 동서무역회사에서는 지금 동남 아세아 몇 군데에 교역을 준비 중이었다. 백방으로 주선하여 완결단계에 이르러 사에서 누구든지 수완 있는 사람이 그 곳으로 가서 여러가지 유리한 협정을 해야 할 계제이었다. 그만한 일을 할 사람은 두 사람 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장과 전무이였다. 사장이 오기전에 벌써 공론은 윤 사장을 적임자로 내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 사장은 단번에 반대하였다.
『나는 못가요』
『이 일은 수완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그곳에 안면으로 보나 윤 사장이 적격자라고 생각하는데…』
중역가운데 한사람이 조심스럽게 윤 사장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당분간 외국에는 갈형편이 못되니까 안돼요. 전무가 가시오. 그대신 내가 그곳 친지들한데 소개장을 써서 내가 간거나 진배없이 알선해 주리다』
결국은 전무가 윤 사장의 자세한 지시와 소개장을 가지고 가기로 하고 그 외의 몇가지 안건이 토의된 후 회의를 끝마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윤 사장은 얼굴에 피로한 빛이 감돌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초조한 기색이 완연한 것 같았다.
『윤 사장 어디 편치 않으신거나 아니오?』
중역 한 사람이 근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아니오. 조금 피곤해서 그러니까 휴식을 하면 나을 거요.』
윤 사장은 억지로 힘을 내어 변명하듯이 대답했으나 그의 이마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원체 오랫동안 외국에서 지내시다가 갑자기 고국에 돌아오시니까 기후가 몸에 안 맞으시는거나 아니신가요?』
서무과장이 얼굴에 함빡 웃음을 띄며 말 참견을 하였다.
『그럴리가 있겠오. 단지 피곤해서 그렇소.』
『아니 그런게 아니라 원체 그립던 고국에 오시니까 몸이 너무 기뻐서 깜짝 놀란거나 아닐까요』
중역 하나가 이런 소리를 해서 좌중이 모두 껄껄 웃고 윤 사장도 웃었다.
『그럼 이제 오늘은 그만 회의를 끝냅시다.』
윤 사장이 일어서니 좌중이 모두 일어섰다. 그러나 윤 사장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눈앞이 아뜩하였다.
『왜 그러십니까?』
서무과장이 눈이 동그래서 물었다.
『아니오. 괜찮소. 나도 곧 갈테니 어서 먼저들 나가시오.』
좌중이 모두 흩어진 후에 윤 사장은 잠시 더 앉았다가 복도로 나왔다. 복도를 지나서 윗층 사장실로 올라가는 총계를 몇개 디디려다가 윤 사장은 발이 딱 얼어붙었다. 맞은 편 복도에서 처녀 하나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 처녀에게 윤 사장의 시선이 용결된 것이었다. 엷은 초록빛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풀어서 뒤로 늘어뜨렸는데 아마 나이 이십이나 되었을가. 누구든지 눈이 끌릴 매력있는 처녀이었다. 그 처녀는 멈춰선 윤 사장을 한 번 힐끔 쳐다보고는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윤 사장은 갑자기 사나운 심장의 동요를 느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