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은 「自己」를 잃어버린 채 「方向感覺」을 상시랗고 「方向感覺」을 상실한 채 「神」에게서의 「逃避」를 하고있다.
現代人들은 모두 급행열차를 타고 있다. 그러나 어디로 달리는지는 모르고 있다. 이것을 現代人의 疏外現象이라고 한다.
그러면 疏外라는 말이 무엇인지 잠간 생각해 보라.
疏外를 보통 「異邦人化」라고 한다. 독일어로 말하면 「알리에나씨오」라 한다. 「엔트프렘둥」은 接頭語 「엔트」(떨어지다)와 「프렘드」(外國人 · 他人)의 合成語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모르는 사람」 「異邦人이 되다」는 뜻이다. 따라서 「엔트프렘둥」을 「異邦人化」라고 번역한다.
「알리에나씨오」는 「알리에누스」(다르다)인 형용사에서 나왔다. 動詞로 말하면 「팔다」 「양도하다」는 법률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어떠한 인연도 없는 것」 「이방인」이라는 뜻에서 이것을 自身을 놓고 생각할 때 「팔려진 自身」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흔히 「자기상실」 「自己分裂」 - 「자기모순」이라는 말로 사용한다.
이렇게 우리는 소외라는 말을 분석해 보았다. 그러면 現代人에 있어 소외현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疏外라는 말이 「맑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씌여졌다. 그는 人間을 「社會關係의 總和」라고 말하고 이것을 경제적 면에서 고찰하여 「人間의 自己疏外」라는 말을 처음으로 썼다. 기계화에 의한 人間性의 喪失, 또는 노동의 商品化에 의한 人間의 「非人間化」를 人間의 소외현상이라고 했다.
이제 나는 「맑스」가 발견한 「人間의 소외현상」을 人間의 絶對 가치의 追求를 놓고 생각하고자 한다. 現代人은 文明의 발달과 더불어 時 · 空을 초월하는 絶對의 問題에 대해서는 無關心과 경시를 하고 있다. 그러나 人間의 文明 또는 과학 人間의 기술이 제아무리 長足의 진보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限界가 있다. 사실 人間은 불완전한 存在다. 人間의 존재는 유한적인 存在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유한적인 存在者, 人間은 한편으로 諸價値를 무한히 追求하고 있다. 또 그것을 향수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生命의 本義임을 우리는 우리 안에서 조용히 깨치게 된다.
人間의 存在와 價値追求 그것은 無限絶對者에게 수렴하고 통일되징 낳으면 오롯한 充足과 自由가 있을 수 없음을, 조용히 자기와 人生을 통찰하면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現代人의 소외현상을 볼 수 있다. 生命의 본의인 절대가치를 망각한 채 個別價値의 追求에만 눈이 흐리고 있다는 것이다.
온 가지 쾌락의 회오리바람과 함께 現代人은 肉體 안에서 맴돌고 있다. 그리하여 自己를 상실한 채 人生의 方向感覺을 잃고 있는 것이다. 마치 흐르는 江물에 어디론지 알 수 없이 나무잎을 띄워보내듯이 自身을 그렇게 「肉」의 흐름 속에 흘러보내는 것이다.
이렇게 現代人은 확실히 方向感覺을 상실하고 있다. 설사 그들이 宗敎를 갖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現世의 充實이라는 点에서, 다시 말하면 自己生活의 方便으로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信仰行爲」는 知와 意에 의해서 영위될 따름이지 전 機能을 통일한 生命活動으로서는 아무런 因綠이 없는 것으로 역긴 채 信仰과 生活이 분리되고 따라서 信仰을 世俗化한 채 自己生活의 奉仕에만 눈이 흐리고 있다. 보라, 오늘날 信仰人의 現實을…. 여기서 나는 일일히 열거하고 싶지 않다.
個別價値에만 마음이 팔리어 自身을 喪失한다는 것, 自身을 無意識化 한다는 것, 이것은 결국 人生을 無意味하게 만든다. 무미곤조 生活의 권태, 실증 나아가서는 人生을 幻滅로 이끌고 만다. 인생의 幻滅 속에 이제 남은 것은 「케세라 세라」뿐이다. 「意志未來의 開拓」이 아니라 「單純未來의 放任」뿐이다. 이 單純未來의 放任의 世界는 神이 없는 世界다.
왜냐하면 「生命의 根源인 神」(에리미아 2 · 13)을 버렸기 때문이다. 放任의 세계가 神을 저버림을 말한다. 「神에게서의 逃避」다.
神에게서의 逃避. 하나의 時代相이며 人間相이다. 사실 神에게서의 逃避는 人間의 歷史가 시작함에서부터 있었다. 「아담은 神의 얼굴을 避하여 동산의 나무사이에 숨었다. (창세기 3 · 8) 또한 그의 아들 「가인」이 그랬다. (창세기 4 · 14) 「아담」과 「가인」은 하나의 罪意識에서 그랬다면 여기서 우리는 神의 逃避에 대한 교훈을 한가지 받는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명한대로 비록 人間이 大罪狀態에 있다 하더라도 神은 自己의 오심에 늘상 계시다함을 認識해야 한다. 이것이 罪意識으로 인한 또 하나의 犯罪를 방지하는 좋은 方策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神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神의 逃避는 우리 生活 안에 여러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生活 「바쁨」으로 神을 멀리하고 逃避하고 있는 것이다. 「바쁨」이 아니라 심리적인 「바쁨」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忙」이라 한ㄷ. 즉 「분주하다」 「부산하다」는 말이다. 어디론지 마음을 팔리고 다니기에 부산한 것이다. 이것이 現代人의 實이며 「人間의 自己疏外」다.
이제 神은 우리에게 人間의 疏外現象을 꾸짖어 나무랜다. 『너희, 世代여,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더냐? 암흑땅이 되었어냐? 무슨 연고로 내 백성이 主께로 가지 않겠다고 하느냐? 처녀가 어찌 장식품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고운 옷을 잊겠느냐? 그러나 내 백성은 나를 잃었나니 그날 수는 헤알릴 수 없다.』 (에레미아 2 · 31-32)
『神에게서의 逃避』는 「아우구스띠누스」의 말대로 『人生의 正道가 아니다. 人生은 神에에게서 神에게로 가는 것이다. 그의 엄격에서 그이 善에로 가는 것이다.』 (S 351 · 12) 이제 우리는 「神에게로」 가 人生의 전부가 되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現代人의 위험」을 모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神에게로」 가 자신의 기구가 돼야 할 것이며, 「시대의 기구」가 돼야 할 것이며, 「시대의 기구」가 돼야 한다. 「톨스토이」의 『神에게로의 귀향』이 다시한번 상기된다. 즉 오래도록 슬픔과 의아속에 드디어 내게 「구원의 시각」이 울렸다. …神은 생동하고 있다. 이것이 神의 生命이며, 지식이람을 말해준다. 生活하라, 동시에 神을 찾아라. 여타 모든 것이 네 안에 빛을 준다하더라도 그보다 强한 것은 없다. 그 불빛은 이젠 너로 하여금 잃지 않게 하리라.
金正元(전주 · 중앙보좌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