刷新(쇄신)하는 敎會(교회)의 本堂(본당)이란 무엇 ②
初代敎會(초대교회) 家庭的(가정적) 本堂人(본당인)을 涵養(함양)
社會(사회)와 같이 必要(필요) 變遷(변천)하는 것
現代本堂(현대본당)에도 長點(장점)있어
事務(사무)·官僚(관료)·形式的(형식적) 맘모스
都市本堂(도시본당)의 缺點(결점)
牧者(목자)와의 關係(관계)도 冷淡(냉담)해지고
여러 세기동안 본당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초대 교회의 생활 및 그 활동에는 융통성이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학자 콜린은 『초대 크리스찬들은 그들의 세속적 삶이 이끄는데 따라 움직였다. 예컨데, 가정의 공동체는 주택지에서, 직업적 공동체는 체살의 왕궁에서, 피난중의 공동체는 「가다콤바」에서 서로 만났음』을 지적한다.
후세기에 와서 시대적 요청에 따라 구역별 본당이 비로소 생겼던 것이다. 확실히, 본당은 하늘에서 내려진 그런 교리에 의해서가 아니고 인간에 의해서 그 구조가 이뤄졌고 변천하는 인간의 필요성에 따라 변천해왔다.
중세기의 마을이나 도시에 있어서 본당은 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체였다. 그 이유는 본당이 정치·경제·문화 등 전체를 통할했기 때문이다.
사학가 무디는 그의 저서에서 『본당만이 학교를 경영했고, 가난한 자들의 구호단체를 지원했고 세속적이며 공적인 모든 활동을 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는 공동체였으며 나아가서는 대중오락의 중요한 원천이 되어서 세속적 행사나 공적행열, 연희 및 가무(歌舞)를 하는데까지 이용되었다』고 기술했다. 이와 같이 본당은 인간생활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오늘날의 불당은 현대도시의 사회적 구조 때문에 이같은 폭넓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 오늘의 本堂 너무 크다
50여년전 예수회의 용감한 사회학자인 픽터 신부는 도시본당에 대해 철저한 과학적 연구를 시도했다. 이 연구에서, 현대본당의 모습은 인접해서 사는 구역주민에게 봉사하는 행정단위로 나타났다. 물론 오늘의 전형적 도시본당은 수백명의 가족들을 포용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크다는 것은 행정적 능율을 올릴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본당이 사회의 모든 계급의 사람과 배경이 다양한 남녀노소를 다 포용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의 풍부함과 다양함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겠다.
본당의 구역성은 이러한 이점을 주는 것과 같이 또한 단일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럴듯하지만 큰 규모와 구역제에 의한 이점은 오늘날 여러가지 불리한 점으로 재평가 되고 있다.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결점은 친밀한 공동체 의식을 상실하는 것이다.
최근에 와서 관심있는 사회학자들은 『본당이 정말 공동체이냐?』고스스로 자문(自問)하고 있다. 만일 이 공동체가 『친구들의 모임이며 서로가 즐거워하고 인격적 관계를 갖게 하는 것』이라면 『노!』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달리 『이 공동체는 하나의 「그룹」이고 그 구성원이 그 「그룹」의 존재를 인식하고 스스로가 구성원임을 생각하며 서로 어떤 상징적 접촉과 왕래(往來)를 하는 것』이라면 『예스!』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늘의 도시본당은 사람들이 우선 따뜻한 상호관계를 맺는 그런 친밀한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 구성이나 사명에 있어서 어떤 2차적 공동체, 혹은 협회처럼 사무적인 것이다.
확실히 규모가 큰 협회적 본당에는 예컨데 가정·수녀원·가정운동 「그룹」, 여러가지 본당 조직체 등등 1차 「그룹」들이 있다.
무더기식 전례와 형식적인 집회로 도시의 큰 본당은 차갑기만 하고 비인격적이다.
이상적인 본당 신부는 목자이요 아버지로서 모든 사람에게 접근 할수 있어야 하고 그의 양떼의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 관심을 표명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본당 신부가 하느님의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공적(公的) 출납계원 같은 직업적 수단을 가진 사람으로, 또는 관료적인 사무관으로 인식돼가고 있는 형편이다.
목자와 신자의 관계는 지배인과 고객의 관계로 변경돼가고 있다.
이같은 현상이 성소를 받은 사제의 모습은 아니다.
그러면 이러한 큰 본당에 대한 반발은 어떠한 현상으로 나타나는가? 픽터 신부는 그의 연구에서 본당에서 뜻깊은 경험을 얻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본당을 벗어나 다른 사회사업이나 교육사업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관찰했다. 그런 일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대로 본당을 떠나 가버리는 사실을 그는 지적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가볍게 보아 넘길수 없는 재미있는 현상이 각지에서 널리 일어나고 있다.
그릴리 신부는 이런 현상을 신(新) 공동체의 생성(生成)이라고 말하고 토만씨는 그런 것을 지하(地下)교회라 지칭한다. 우리가 원하든 말든 간에 공동구역의 기준에서가 아니고 공동 이해(利害) 내지 관심에 따라 비공식 신자 공동체가 발전돼가고 있음은 사실이다.
흔히 신공동체는 새로운 형태를 실험하려는 가정전례로 집약된다. 대학생중 많은 학생들도 본당전례에서 뛰쳐나와 어떤 비공식 실험전례에 참석하기를 원하고 있다. 여러 곳을 둘러보고, 활기없는 본당전례에 매력을 잃은 젊은 부부로 이룩된 새로운 형태의 「신공동체」를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었다.
교회지도자들은 현재 널리 번지고 있는 그런 실험들을 심각한 욕구불만의 표현이라기보다 단순한 불순명으로 해석하고 있는 경향이다.
그러나 그런 「신공동체」가 내일의 크리스찬의 회합의 선구가 되어 공적 저항을 물리치고 인정을 받게 되지 않을가 생각된다.
교회의 장래는 신자들 사이에 친밀한 공동체를 이룩하는 능력이 좌우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가족과 같은 작은 공동체가 인간본성의 요람이 되어서 따뜻한 상호관계의 조직망을 통해 인간 인격이 함양되고 그런 작은 「그룹」 속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또한 무엇인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널리 인정하고 있다. 크리스찬의 참된 신분은 친밀한 크리스찬의 작은 「그룹」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본다. 만일 오늘날 커가는 그리스도교 신자 단체 안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고 자각하는 작은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불행한 일이라 하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