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發(개발)되는 農村(농촌)찾아 - 疏外(소외)된 社會參與(사회참여)의 動脈(동맥)] ① 敎會(교회)와 農村(농촌) ①
農村(농촌)⇨창조의 殿堂(전당)
죽지 않고 버려져 있을 뿐
神(신)의 뜻 담긴 無盡(무진)한 寶庫(보고)
敎會의 近代化을 지향하고 福音精神에의 복귀를 强力히 要求하는 敎會는 새로운 社會問題로 農村社會의 後進性을 지적하고 심한 「不均衡」속에 고민하는 농민들을 원조할 것과 그 救濟의 원칙과 방향 敎示함은 당연한 일이며 또한 時機에 적응한 일이라 하겠다. 農村問題에 대한 관심을 歷代敎皇 中 가장 많이 표명한 교황은 요한 23세 聖下였다.
同 敎墓의 회칙 「어머니와 교사」가 發布된 것이 61년 5월이니 벌써 7년전의 일이다. 작년 3월에는 바오로 6세 敎皇께서 회칙 「諸民族의 發展」을 발포하여 이 문제해결의 總體的이며 명확한 指針을 내리신지 1년이 넘는다.
그러나 이러한 「바티칸」의 소리높은 외침에 응하는 이 강토의 「메아리」는 너무나 微少했음을 우리는 否認할 수 없다. 해방후 국내 救個處에서 농촌문제 해결을 위한 교회활동이 없지 않았고 또 현재도 그 努力이 계속되고는 있지마는 대개가 소위 外援에 의한 것이고 평신도들의 兄弟愛의 발로인 農村社會活動을 찾아보기 힘들다. 더구나 농촌본당을 중심으로한 農民자신들의 활동과 조직에 이르러서는 아직 황무지라 아니 할 수 없다. 본사는 本社 金達湖 論說委員에 위촉하여 농촌사회를 위한 敎會活動의 현황을 살펴 소개하며 그들과의 對話를 통하여 우리 農村의 特殊事情下에서 교회의 노력이 具現될 길을 讀者諸賢과 더불어 모색해보고자 本欄을 設置하는 바이다. -編輯部-
예수님은 『굶주린 百姓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약간의 밑떡과 물고기를 축복하사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또 먹고 남은 조각들을 모아 저장케 하셨다. 밀떡과 물고기는 農漁村의 主塵物이다. 農水産物의 增收는 天主님의 祝福에서 이루어진다. 天主님은 우리들 형제들의 굶주림을 願치 않으신다. 굶주린 百姓들을 說敎하시기 전에 먼저 먹이시고 또 먹고 남은 잉여 농산물까지 마련하사 生必品의 所重함을 垂訓하셨고 또 후일과 거기에 同席하지 않았던 兄弟들의 食糧까지 念願하셨던 것이다.
敎會의 念願과 關心事와 活動은 2千年來 不定하는 總體的인 人間救濟다. 一部에서는 아직도 敎會는 靈魂만 다스리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육신事情에만 골몰하는 곳은 더욱 아니다. 敎會가 希望하고 또 그것을 爲하여 活動하는 坐標는 「人間」 바로 그것이다. 人間의 講和된 均衡잡힌 總括的인 發展만이 人間의 尊嚴과 自由를 보장해주 기 때문이요. 地上生活을 天主님의 뜻대로 살아난 「人間」이 그대로 天國에도 들어가고 또 잘못되면 地獄의 고초도 靈魂만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人間」이 당하는 것이다. 우리의 關心事는 經濟成長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實로 「人間發展」에 있다.
「現代世界司牧憲章」에서 敎皇께서는 새로운 社會問題 中 그 첫째로 農村社會의 참상을 들어 그 原因을 「不均術」에 있다고 했다. 現代世界는 不安속에 살며 平和을 위협하는 갖가지 要因中 最大의것이 곧 이 不均衡인 것이다.
우선 個人生活이 그러하고 地城間이 그러하고 國際間이 그러하다. 이 不均衡이 解消되어 個人이 均衡과 調和속에 살고 世界의 生活差의 폭이 좁혀지는 날 世界에는 眞正한 平和가 오리라.
農村民의 生活은 都市民 即 工業이나 다른 「서비스」業에 從事하는 人口보다 그 生活의 격차가 너무 심하다.
우리의 농촌이 이처럼 비참하여 失意에 차있는 한 우리는 거기에 천주님의 복음을 심을 수 없는 것이다. 農村民 원조한다고 해서 곧 그들이 백만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요. 도시민들보다 더 잘 살아야한다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형제들의 생활에 격차는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농업문제에 관한 우리敎會의 견해와 지시를 살펴보자. (계속)
金達湖 記(本社論說委員·慶大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