忘却(망각)을 이긴 詩人(시인) 제랄드·홉킨즈
혁신적인 이미지로 신앙 모색
詩(시)의 目的(목적)…神(신)의 榮光(영광)과 人間(인간) 사랑에 있어
한때 詩人(시인)의 꿈 버리고 예수회에 입적
死後(사후) 4년만에 詩人(시인)의 위대함 인정받아
1953년 11월 美國 旅行 中 요折한 天才詩人 디란·도마스는 詩를 쓰는 이유를 첫째는 神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인간-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라 했다. 이러한 思想은 인류사상 시인의 탄생과 더불어 생긴 관념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찌기 희브리 시인들이 그러했고 현대에 와서 현대시의 사상적 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라이나·마리아·릴케와 T·S·엘리올이 그 대표적인 시인인 것이다.
여기 소개하는 제랄·멘리·홉킨즈(GERALD MANLEY HOPKINS)도 영문학사상 죤·단 이후의 가장 위대한 종교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생존시에는 시인의 칭호도 받지 못했고, 사후 30년 후에야 친구 부릿지스에 의하여 詩集이 出版되고, 그 후 10년이 더 지나서야 그 위대함과 심오함이 밝혀지고 인정된 시인이다. 그는 사실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이지만 20세기 영시의 출발점이 되는 시인이다.
홉킨즈는 1884년 영국 「예섹스」의 「스트럴포드」에서 한 중류가정의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재한 문필가였고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가 였다.
아마 홉킨즈의 예술적 자질은 아버지에게서, 처절한 고투속에서 구원의 세계로 향하는 신앙심은 어머니에게서 이어받은 것 같다. 소년시절부터 홉킨즈의 예술적 자질은 음악·미술·시에서 뚜렷했다. 그는 시인이나 화가를 꿈꾸었다.
하이겟트 고등학생시절에는 이미 키이츠風의 시를 써서 장원을 했고 그의 기질은 만사에 괴벽한 경향을 보였고 독서열이 강한 조숙한 학자란 평을 받은 학생이었다.
1863년 「옥스포드」의 「벨로일」대학에 입학한 흡킨즈에게 그의 일생을 결정지을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것을 감지치 못한 그는 프리·라화멜派와 라스킨의 영향을 받아 여전히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생태로 종교적 경향이 농후했던 그는 당시 「옥스포드」의 정신계를 지배하였던 「옥스포드」 운동을 외면할 수 없었다. 여러 학우들과 함께 이 운동의 영도자 피지 박사에게로 달려갔으나 그곳에서 얻은 교권과 자유의 문제는 그를 한층 고뇌로 몰아넣었다.
이리하여 홉킨즈는 위대한 사상 명석한 지성 예리한 시적감수성으로 인하여 전부터 존경하여 오던 뉴우만 박사에게 고뇌의 해결을 위하여 달려간 것이 결국 뉴우만 박사의 강력한 人格的牽引力 사로잡혀 가톨릭으로 改宗하게 되었다. 이 詩人의 단조로웠던 일생의 외적생활에서 가장 극적인 경우가 이때일 것이다.
1866년에 홉킨즈는 개종을 하였지만 그의 개종전의 시에도 이미 그의 종교적 갈망이 뚜렷히 나타나 있다. 다음의 시는 친구들과 어느 수도원을 방문하였다가 받은 감명을 노래한 것이다.
내가 가려고 바란 곳은 샘물이 마르지 않고 솟는곳
사납게 측면으로 우박도 휘몰아치지 않는
몇포기 흰백합꽃이 피는 들가입니다.
그리고 내가 있고 싶어 한 곳은
폭풍도 휩쓸어 오지 않는 곳
부푼 녹색의 파도의 항구가 침묵하고
외해(外海)의 동요가 미치지 않은 곳입니다.
(天上의 港口-副惠, 한 수녀 수도원에 들어가다.)
이 시는 두개의 제목이 불어 있는데 「한 수녀 수도원에 들어가다」라는 설명적인 부제가 이 시가 무엇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가를 암시하고 있다. 세상의 무상을 느끼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한 수녀의 감정은 홉킨즈가 갈망하는 정신적 상태이며 고통스러운 현세를 피하여 영원한 평안과 안식처인 天上의 港은 홉킨즈의 인생의 목적지이기도 한 것이다. 이 한편의 시로서도 당시의 홉킨즈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다.
金榮秀(英文學·馬山大學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