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宗敎觀(종교관)] ⑧ 平生(평생) 一貫(일관)된 宗敎觀(종교관) 어려워
神(신)은 人間(인간)의 知力(지력)밖에 存在(존재)할 수밖에 없어
발행일1968-06-09 [제622호, 4면]
내 平生 이처럼 거북한 글의 청탁은 받아본 일이 없었다. 따라서 이글에서 나의 종교관이라는 것이 정리될 것인지 어떤지 저윽히 불안하다. 人間에 있어서 뚜렷한 종교관이라는 것이 平生을 일관해서 흐른다는 것은 퍽 어려운 것 같다.
陶醉나 倒錯에서 빚어 나오는 信仰이라는 것은 大端히 危險한 것이어서 거기에서 어떤 다른 方向에의 자각을 했을 때는 거의 大多數의 사람들이 이 宗敎에서 멀어진 生活을 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現代라는 이 知的組織社會에 있어서 知的으로 움직여야만할 사람들 또는 物質에만 倒錯된 神을 잃은 이 群像들은 무엇인가의 다른 地平을 볼 겨룰을 잃은 심한 競爭意識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 도달한 사람들의 명상은 「無」라는 壁에 부딪치고 만것이 된다. 現代人의 모든 思考가 그러하듯이 이들의 不安은 神이라는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데서 곧 神의 不在를 速斷하는 것 같다.
구체적인 신앙이나 宗敎觀이라는 것은 수의 計算이나 論理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므로 벌써 이렇게 해서 파악된 神은 파악된 그 순간부터가 그것은 神이 아니라 하나의 偶像으로 轉落하게 될 것이다. 이 비유는 소경의 아이가 開眼을 했을 때 어머니라는 人間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고 무서워서 어두운 곳을 찾아 숨는다는 이야기에 해당한다. 소경으로 있을 때의 어머니라는 아름다운 「이미지」가 눈을 뜨고 보니 動物形像의 어머니를 보고 幻減과 공포감을 느꼈다는 것이 된다.
신앙이라는 것은 먼 地坪을 찾아 다가가지만 그 地平이 낭떠러지가 되어서 우리들 앞에 다가선 것이 現代의 無의 世界이다. 功利性이나 조급성을 지양하고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는, 말하자면 하늘의 層階를 올라가는 萬一 神이 存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敬虔한 態度로 하여금 救援받는 靜일의 世界는 곧 하늘의 境地라 하겠다.
사람들의 科學에 대한 過信은 生命의 秘密이나 神의 存在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으로서 찾아보지 못한 탓을 存在하지 않는다는 結論으로써 미봉하려 한다. 어떤 識者가 말하기를 神을 肯定하는 것이 바보들의 일이라고 한다면 神을 否定한다는 것은 한층 더한 바보의 짓이라고 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어 질때 사람들은 무엇인가의 絶對의 힘에 依支하려고 한다. 이 畏怖의 感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에의 길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人間들은 자기네들이 가지고 있는 能力(科學이나 物質 또는 體力)으로 하여금 神에 代置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죽음의 確實한 事實을 잊고 있는 것이고 科學에 대한 信用은 사람들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두뇌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이 超絶이 우주섭리에 의해서 運行되고 있는 限 神은 存在하고 있은 것이다. 그러나 神은 우리들이 상상하고 있는 인간을 닮고 敎會의 律法에 의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個體가 아닌 여러가지 複合의 造化에 의해서 運營되고 심판되는 그 무엇인가는 아무도 알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사람들이 안다고 하면 人間의 이 知能탓으로 神은 다른 모습으로 숨을지도 모른다. 人間의 이 知力은 結果的으로 순결한 좋은 結實을 맺지 못하게 음모와 計略을 꾸밀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