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對談…오기선 신부, 이서구씨
이=신부님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병인순교 1백주년 기념관이 세워진 절두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요.
오=절두산이란 목을 자르는 산이라는 말인데, 듣기에 몹시 살벌하고 각박하지 않습니까? 병인년에 약1만명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목을 잘렸다고 하지만 확실한 고증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우리 조상들이 천주님을 위해 목잘리우기를 나무토막 잘리듯 했으니까요. 작년 10월 21일 기념관, 축성식을 했고 22일 낙성식을 가졌는데 이날은 1백1년전 이의송(프란치스꼬) 부인 김마리아(엇분) 아들 베드로(봉익) 3명 13명이 이 자리에서 순교했습니다.
1839년 기해년에 학살된 프랑스선교사의 유해를 찾고 우리 정부와 통상해서 우리나라에 성당을 세울 목적으로 1866년 9월 25일 프랑스군함 두 척이 양화진에 정박했는데 대원군은 노발대발 성이나서 함선을 물리쳤지요, 군함을 물리치고도 성이 가시지 않아 외국 놈이 딛였던 이 땅은 천주교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버려야 한다고 그해 10월 22일(기념관 낙성식날)부터 신자들을 잡아들여 절두산에서 죽이기 시작했읍니다. 이 선생님은 역사적인 유래를 잘 아시니까 옛날에 절두산은 무엇을 하던 곳인지 말씀해 주시겠읍니까.
이=네. 절두산 기념관을 짓기 전에 제가 가 보았읍니다. 돌산으로 되어 있는데 목을 대고 자르기 아주 좋게 생긴 돌이 낭떨어지에 있더군요. 양화진은 강화도로 가는 길목이었어요. 왕이나 귀족이 유배 갈때 양화진에서 배타고 갔답니다. 그리고 김포지대가 곡창이라 곡식 수송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또 설경이 좋아서 서울 10경중 하나가 양화진 이었습니다. 그리고 김옥균의 시체를 관속에서 꺼내 다시 갈기 갈기 육시를 하던 곳이 이곳이고 보니 양화진은 역사적으로 비극의 터 입니 다.
오=민 주교님이 빠리에서 돌아오실때 신자들이 모두 양화진 언덕에 나와서 환영했답니다. 그리고 보니 이곳이 국제항로 같이 되었던 곳입니다. 제 생각에는 기념관 안에 박물관도 있고 경치도 좋고 또 역사적으로 이러한 내력이 있는 곳이니 휴일에 소풍삼아 구경갈만도 하지요.
이=그럼요. 절두산 기념관내에 있는 박물관은 역사적으로 이색적인 것이고 경치도 좋으니 시골에서 오시는 분들 한번씩은 다녀갈만합니다. 낚시터로도 좋아 옛날에 대원군도 이곳에서 낚시도 했나 본데 어쨌든 한강을 바라보는 경치도 좋고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있으니 한번 구경갈만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