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현세에 얽매어있는 사람만이 가까운山이 자기세계의 경계고 자기가 사는 우주는 강변에서 끝이나고 공동의 인간성은 한도시에 同居하고 있으며 자기와 같은 견해를 갖고 같은 피부색을 갖고있는 한정된 사람에게만 있다는 암흑시대의 미신에 사로 잡혀있다. 이 古代의 잔인한 미신의 마지막 殘骸를 인간의 문명에서 제거하는 것은 이 세상 젊은이 여러분의 과업이다』(66년 「케이프타운」대학서 -로버트·케네디)
5일 하오 4시 45분(한국시간)「젊은 세대의 기수(旗手)」로 불리우던 로버트·케네디가 흉탄에 쓸어지던 시각에 교황은 성베드로」대성전 에서 주례(週例)일반 접견식을 베풀고 있었다.
이 비보(悲報)를 전해들은 교황은 한동안 넋읽은 표정으로 있다가 숨이 막히는 듯 잘 알아들을 수 없는 흥분된 목소리로 군중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교황은 즉시 존슨 미국 대통령과 케네디 의원 부인에게 전보를 보내어 『크리스찬의 양심과 시민의 양심을 거느린 슬픈 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의 뜻을 전달했다.
■ 牧師가 神父찾아 狙擊 直後 현장서
○…케네디 의원이 괴한으로부터 저격을 받고 「앰배스더」호텔 복도에서 쓸어져 있을때 어떤 신부 한사람이 급히 달려와 몰려든 군중을 헤치고 케네디 의원에게 『병자의 성사』를 주고 묵주를 케네디 의원의 손에 지어주자 케네디 의원은 묵주를 꼭 움켜잡았다. 이에 앞서 프로테스탄트 목사 한사람은 재빨리 「마이크」를 잡고는 의사를 부르고, 신부를 부르고 연거푸 기도를 드리며 「죽퍼 먹은 자리」 처럼 몰려드는 군중을 정리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11번째 아기를 임신중인 에델 케네디 부인은 『신부님 기도해주세요, 그이가 회복되게 기도해주 세요』를 되풀이 되풀이 했다.
「굳·사마리탄」병원으로 옮겨진 케네디 의원은 두번째 「병자의 성사」를 받았다. 병원에 있던 그 신부는 케네디 의원이 이미 「병자의 성사」를 받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세번이나 멈춰 葬禮行列, 貧村앞
○…뇌수술을 받은지 25시간 29분만에 전세계의 애절한 기도도 보람없이 절명해버린 케네디 의원의 장례식에는 다같이 흉탄에 남편을 잃은 에델 여사, 전 케네디 대통령 부인인 잭클린 여사, 킹 박사의 부인인 코레따 여사가 참석했고 수도 「워싱턴」의 빈민촌에서는 세번이나 행렬이 멈췄다. 장례미사는 「시카고」의 코디 추기경과 「보스턴」의 쿠싱 추기경 및 「뉴욕」의 쿠크 대주교가 장례미사를 주례했다.
■ 公議會때는 유태人 釘死 責任을 反對하기도
○…존슨 대통령은 『범죄경력을 가진 사람이나 혹은 심리상태가 불안정한 사람에게 흉기를 가지지 못하게』하는 총기단속법안을 강화하여 빨리 통과시켜 줄 것을 의회에 호소했는데 로버트·케네디 의원은 이 법안통과를 강력히 주장한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고 동생 에드워드·케네디 의원이 이 법안을 제안했었다.
로버트·케네디 의원은 또한 제2차 「바티깐」 공의회때 그리스도를 못박은 죄를 유태인에게 묻지 않는다』는 대(對) 유태인 선언을 공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1964년에는 폴란드를 여행하는 중에 폴란드 정부 당국의 경고를 무릅쓰고 비진스키 추기경을 만났고 교황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를 알현했다. 로버트·케네디 의원은 신앙심이 깊었고 신앙생활도 착실했으나, 논쟁을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반드시 「가톨릭입장」에 서지는 않았다. 그는 많은 가톨릭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뉴욕」주의 이혼법과 유산(流産)법에 찬의를 표명했다.
■ 兄이 大統領 指名 받던 나이에 殺被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는 담배가 건강을 해친다는 점과 담배 제조회사의 공중(公衆)에 대한 무책임 및 그들의 막대한 경제력에 줄곧 관심을 가져오다가 작년 9월에는 담배광고를 제한하고 광고에 담배가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명시할 것을 주장하면서, 담배에 포함된 「타르」와 「니코친」의 함량에 따라 순응률(順應率)에 입각한 세금을 부과하자고 제의했다.
○…케네디 의원의 저격범이 서한·서한이라는 요르단 출신이기 때문에, 「유엔」에서 이스라엘과 요르단 문제가 재논의 될 가능성마저 비치고 있다. 이상하게도 5일은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중동전쟁 발발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또한 당년 42세인 케네디 의원은 그의 형인 케네디 전(前) 대통령이 가톨릭신자로서는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던 때와 꼭 같은 나이었다.
케네디 의원은 그의 형이 대통령후보로 지명 받은 「로스·엔젤스」, 바로 그 도시에서 68년도 대통령후보로 지명될 중요 발판을 닦아놓은 순간, 그의 이상은 무참히도 흉탄에 꺾여 형의 무덤에서 불과 7「미터 떨어진 곳에 빗방울을 머금은 달빛아래 안장되어 나란히 잠들게 되었다.
■ 暴力으론 正義制止 안돼
○…「바티깐」의 일간 신문「옷세르바또레·로마노」지는 사설을 통해 케네디 의원의 암살 행위를 개탄하면서 『미국 정계를 피로 물들인 폭력행위는 생명과 자유의 가치를 존중하는 모든 이의 가슴을 충격과 슬픔과 분노로 뒤흔들어 놓았음』을 지적하고 『뉴·프론티어로 향하는 역사의 행진을 폭력으로 제지할 수 있다고 믿는 이의 무모한 행동』을 통박했다. (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