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世紀(세기) 살아있는 童話(동화) 노래하는 트라프家(가)
映畵(영화) 「보리수」의 主人公(주인공)들
戰後(전후)엔 祖國(조국)이해 放浪歌族(방랑가족) 되고
「트」 男爵夫人(부인), 英語(영어) 서투러 主敎(주교)님더러 「꺼져라」
한국에도 원조 - 현재 「피지」島(도) · 「뉴기니아」 위해 巡廻(순회)
한 女人(여인)의 不屈(불굴)의 信念(신념)
不幸(불행)한 世紀(세기). 善行(선행)으로 누벼
비오 12世(세) 훈장 받고 「가톨릭 어머니」 로 命名(명명)
『인생에 있어서 우리의 목적은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는 것이며 다음에는 그뜻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다』 영화 「보리수」의 진짜 주인공인 여남작(女男爵) 마리아 · 오구스타 · 트라프 부인은 최근 한 대학의 「켐파스」에 운집(雲集)한 수많은 대학생들을 향하여 이와같은 충고의 말을 던졌다.
정말 트라프 부인은 인생에 있어서 자기이 위치와 목적을 확실히 발견했었고 젊은 대학생들이 따를 수 없는 정력과 결의(決意)로 자기의 사명을 수행해 왔다.
대학 「캠퍼스」에 나타난 트라프 부인은 초록색과 흰색으로 된 오지리의 전통적인 옷차림이었고 머리수건으로 뒷머리를 가리우고 있었다.
키가 훤칠한 부인은 표정이 풍부한 얼굴에다 손짓과 말씨는 30년전에 떠나온 고향 구라파의 바로 그것이었다.
「트라프 음악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트라프 부인이 저술한 많은 서적과 「보리수」 등 세편의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일반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마치 동화(童話)처럼 여기고 있어 트라프 부인은 자기의 가족에 대하여 얘기할땐 언제나 『옛날 옛적에』하며 말문을 연다.
처녀시절에 트라프 부인은 오지리 「쌀즈부르그」에 있는 「논벨그」 수녀원의 예비수녀였는데 그당시 「쌀즈부르그」 교외에 살던 해군대령 게올그 폰 트라프의 병든 딸을 간호하다가 트라프 대령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후 「나치」 독일군이 오지리를 침략하자 트라프 일가는 이태리로 피난하여 구라파 일대를 떠돌다가 마침내는 미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트라프 부부는 프란즈 와즈너 신부의 도움을 받아 10남매를 데리고 미국 전역을 누비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47년에는 남편 트라프 대령이 세상을 떠나고 1951년에는 막내딸 말띠나도 사망했다.
전쟁이 끝난후 트라프 일가는 「오지리 구조기금」을 마련키 위해 쉴새없이 노래부르고 모금(募金)운동을 벌였는데, 여행에서 돌아오는 그들의 「버스」는 관대한 미국 청중들이 보내온 옷가지와 생활필수품들로 가득차 있었다.
트라프 부인의 인생행로에는 웃음을 자나내는 일들도 많았다.
트라프 부인은 소녀시절에 수녀가 되기를 갈망했다. 그래서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수녀회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수녀들이 관(棺) 속에서 잠을 자리라고 믿고 있었는데 보통 침대에서 자는 걸 보고 약간 실망했다』고.
부인은 미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처음으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불행히도 그것은 속어(俗語)였다. 그때 부인은 『방 안에 있는 사람을 밖으로 배웅할 때』 쓰는 단어를 하나 배워두었다. 그후 미국 「시카고」 부근에서 순회공연을 하는 동안 트라프 일가는 한 근엄한 주교님과 저녁식사를 함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식사가 끝나고 주교님이 식당에서 나갈 차비를 갖추자 트라프 부인은 얼른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손짓 몸짓으로 주교님을 배웅할려는 찰라, 배안에서 배운 단어가 퍼뜩 생각나자 아주 우아한 태도를 가다듬어 한마디 했다.
『꺼져라!』
트라프 일가의 순회공연이 미국에서 당장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에 그들은 구라파식의 과묵(寡默)함을 그대로 드러내어 팔을 빳빡하게 고정시킨 채 격식을 차리고 미소를 잊은채 노래를 불렀으며 더우기 그들의 연주곡 목도 대부분 16, 17, 18세기의 것이었다. 글기ㅗ 무대 위에서 공연하다가도 파리가 얼굴에 날라들면 트라프 부인은 청중의 시선을 무시하고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저어 버리기가 일쑤였다. 드디어 그 극성스런 파리도 노래부르는 부인의 입속으로 날라듦으로써 때를 만나고 말았다. 부인은 파리를 재빨리 삼켜버렸던 것이다. 『맛이 쓰더군』
프라프 일가의 집은 「버몬트」주 「스토우」에 있는데 산악지대로서 모국(母國)인 오지리를 연상시켜 주는 소박한 오막살이는 『동화』 속의 집으로 착각할 지경이다 트라프의 오막살이는 1년내내 개방되었으며 경루에는 「스키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찾아들고 여름에는 피서객들을 맞이한다.
트라프 부인은 태옆양 남부에 있는 「피지」 제도(諸島)와 「뉴기니아」의 원주민들에게 신앙을 심는 일을 돕기 위한 돈을 마련키 위해 현재 순회공연 중인데 부인이 딸 한사람이 그곳에서 원주민을 돕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은 한국에도 도움의 손길을 뻗쳐 1960년에는 온가족이 수놓은 제복(祭服) 일습과 교리서적 신공책 약 백권을 대구대교구의 루디 신부에게 기증해온 바도 있는데 부인과 같은 고향인 루디 신부는 부인의 후원으로 3년간 신학공부를 했었다.
트라프 부인은 자기의 가정을 영화화 한 「보리수」에 대해 논평 어릴때 말괄량이었던 자기의 역을 배우 쥴리안드류스가 잘 해주었다고 기뻐하면서도 트라프 일가가 산을 넘어 스위스로 피난하는 마지막 장면은 사실과 달라 영화대로라면 바로 힛틀러이 진영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하면서 『「할리웃」사람들은 지리를 모르는가?』고 반문했다.
트라프 부인이 여(女)남작의 작위를 갖게된 것은 남작이었던 아버지가 부인이 어릴때 사망함으로써 이어 받은 것이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3년 트라프 부인에게 교황청 훈장을 수여했고 오지리 정부로부터는 금성(金星)공로훈장을 수여받은 부인은 1956년에는 『가톨릭 어머니』로 명명되었으며 1958년에는 미국시민이 되었다.
트라프 부인이 이룩한 선행(善行)은 불굴의 정신과 그녀의확고한 철학적 신념 때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문이 닫혀있다고 굴하지 말라.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라. 그러면 열려있는 창문을 찾으리라』는 것이 부인이 철학적 신념이었다.
트라프 부인은 수년동안 수많은 『창문』을 열어 젖혔으며 부인의 일생은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 일로 점철돼 있다. 부인은 자기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알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 왔던 것이다.
(센데이 · 비지터에서 - 編輯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