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明發達(문명발달) 속에 더 무거워진 짐 現代(현대)와 人類(인류) 司牧(사목)
敎會(교회) 現代化(현대화)‧海外旅行(해외여행)·對話(대화)
歷史(역사) 更新(경신) 世界(세계) 牧者像(목자상) 具現(구현)
公議會(공의회) 후 不安(불안)·激動(격동) 시달려
病苦(병고) 아랑곳 않고 平和(평화)에 執念(집념)
6月(월) 30日(일)로 登極(등극) 5年(년)의 바오로 6世(세)
그 어느 때 보다 重疊(중첩)한 難題(난제)
건강상태가 좋지 못해 숱한 고생을 겪어가면서, 교황좌 재위(在位) 5년을 이제 막 넘긴 바오로 6세, 그는 지난 1년 동안 병고(病苦)와 중대 수술까지 치루면서도 교회와 전세계의 평화를 위한 노력을 결코 그치지 않았다. 오는 9월이면 71세가 되는 죠바니·바띠스따·몬띠니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1963년 6월 21일,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세계 도처에서 발발한 전쟁들과 논쟁의 불씨들은 가뜩이나 약한 교황의 건강상태에 끈덕진 희생을 강요해왔다.
언젠가, 라띤·아메리카의 주교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공의회 후 사제들과 평신자들의 불안상태와 교회를 뒤흔들고 있는 격동의 소용돌이에 대해 언급할때 교황은 분명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며, 흑인지도자 킹 박사와 로버트·케네디 상원의원을 암살한 「난폭한 죄악」을 본능 개탄할 땐, 교황의 본능적인 전율이 「성 베드로」대성전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성지(聖地)에서의 불뿜는 전쟁이 결말을 본 것은 바오로 6세가 교황으로서 5년째 직무를 개시할 즈음 이었다. 그는 상방(相方)의 전재민을 돕기 위해 구호품과 구호금을 보냄으로써 그의 시무(始務)를 기념했으며, 이어 6월 26일에는 새 추기경 27명을 탄생시켰다.
교황은 또한 터키를 순례 방문하여 전세계의 시선을 한몸에 모았다. 6월 25·26 이틀간에 걸친 여행을 통해 그는 제3차 공의회가 개최됐던 「에페소」에서 기도를 올렸고, 희랍 정교회의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와 역사적인 재회(再會)를 함으로써, 그해 10월에 총대주교가 「로마」를 답례방문할 계기를 마련했다.
바오로 6세의 재위(在位) 5년째 즉 지난 1년 동안 교황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중의 하나는 그가 오래전부터 약속해온 성청개편 작업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 작업은 작년 8월 15일자로 「전세계 교회의 통치기구」란 교황령이 발표됨으로써 실현단계에 들어섰다. 성성(聖省)과 사무국 등의 전통적인 명칭이 변경되고 성청직원의 임기(任期)가 제한됐으며, 새칭 「교황궁」은 과거의 그것이 아니게 되었다. 교황은 이같은 성청개혁 작업을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태리 출신 고위성직자들이 종전까지 요직을 독점해온 성청을 국제화하기 위해, 미국의 브레난 추기경을 「성사성성」장관으로, 유고슬라비아의 세퍼 추기경을 「신앙교리 성성」장관으로 화란의 풀스텐벨그 추기경을 「동방교회 성성」장관으로, 스위스의 구트 추기경을 「예부성성」장관으로 각각 임명했다.
교황은 이러한 현대화에 「고집」을 점차적으로, 그러나 확고한 자세로 밀고 나갔다. 이러던 중 작년 9월초에 교황은 수술을 받아야 할 병을 않게 되었고 수술을 재촉하는 의사들의 성화가 대단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와 제3차 세계평신자대회 및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의 「로마」 방문 등 목전에 임박해있는 중대사들 때문에 즉각 수술에 응할 수가 없었다. 9월 29일, 교황 바오로 6세가 개회식을 주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로마」에서 한달동안 계속되었고, 이와 동시에 10월 11일부터 18일까지 제3차 세계평신자 대회가 역시 「로마」에서 개최되었으며, 26일에는 「아」 총대주교가 「바티깐」을 방문하여 28일에 떠났는데 이날 양교회의 지도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재통합하려는 의도(意圖)와 소망을 재확인 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같은 중대 사건들이 진행되는 동안 의사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광범위한 접견식도 연달아 베풀어온 교황은 「아」 총대주교가 떠날 무렵에는 너무나 약해져 있었다.
그래서 교황은 그 이튿날인 10월 29일 세계 주교대의원 회의의 폐막식에는 물론 이와 아울러 거행된 버닐도 성인의 시성식(諡聖式)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다.
11월 4일, 드디어 교황은 특별히 마련된 수술실에서 섭호선(攝護선)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회복기간은 길었다. 12월 8일에는 례(例)의 그 「고집」으로 수술 후 첫 여행을 감행 「로마」 근교에 있는 성모당을 방문했다.
성탄절을 얼마 앞두고 교황은 새해 1월 1일 「평화의 날」로 선포하고 전세계 모든 가톨릭신자들과 선의(善意)의 모든 이가 이날을 기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후 차차 건강을 회복한 교황은 평상시의 집무를 시작했다.
부활축일이 가까워 오자 교황은 과거와 같은 규모의 성주간 행사를 「고집」했다. 행사가 진행됨에 따라 교황의 모습은 점점 더 파리하게 보여 측근자들의 가슴을 조이게 했고 성지주일 킹 박사의 죽음을 얘기할 땐 온몸이 무섭게 떨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으며, 성 금요일 밤 「십자가의 길」 행사에 참석했을 땐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사신(死神)의 그림자조차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부활축일이 되니 교황은 생기를 되찾은 것 같았고, 「성베드로」대성전 「발코니」에서 전통적인 부활강복을 주는 그의 음성은 똑똑하고 힘이 있었다.
이제 교황이 정말로 회복됐다는 사실은 그가 오는 8월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로 비행하여 국제성체대회에 참석한다는 발표로 보아 확신할 수 있다.
평화를 위한 교황의 노력은 1년 내내 그치지 않았다. 그는 성지(聖地)의 평화를 호소했고, 나이제리아와 월남의 평화를 호소했다. 미국과 월맹의 대표가 평화협상을 벌인다는 발표를 듣고 교황은 「바티깐」까지 협상장소로 내 놓았던 것이다. (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