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에서 위령미사를 드리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외교인의 그 정성이 더욱 미풍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외교인 촌에 끼어사는 신자집이라면, 대상날에 자식들이 구비구비 맺히고 마디마디 한스러운 부모의 은혜에 대해 고마웠던 과거사며 불효했던 일들을 줄줄이 엮어 지은 제문과 부모의 사진이나 신주나(현대인은 신주 그 자체를 선조의 혼이 있는 물체로 알지 않고, 옛부터 전해오는 풍속을 따르는 것이니 미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방 앞에 차려놓는 저녁제의 떡함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깃자깃한 잔정을 가득히 담은 딸들의 심리발로에서 나온 풍이니 신자들의 집안에서도 한 번 실행해 봄으로써 외교인들을 흐뭇이 접대하는 애덕을 베풀 어 천주교인도 부모께 대한 인정의 눈물이 있고 자기들과 생리가 같은 사람들임을 알게 하여 가톨릭으로 마음 쏠리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거기에다 위령기도나 위령미사를 끼워서 예식을 갖춘다면 무엇이 어색하겠으며 무엇이 공식회의 정신에 어긋나겠는가? 시골 본당과 공소에서는 이런 방법을 신자들에게 가르쳐서 신자들이 외교인들 사이에서도 의젓한 신앙생활을 하게 할일이다.
②미신적이어서 결코 할 수 없다는 점의 그 근본정신을 생각해 보자.
㉠반(飯含)은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이나 엽전이나 옥이나 전주나 자개를 3개 넣는 예식인데 미신같지만 그것은 죽은 사람의 입이 푹꺼져 보기 싫지 않게 하기위해 하는 것이며, 밥을 넣는 것도 그것을 먹느라고 벌레들이 시체를 해치지 못하게 한다는 생각으로 한 예식이다. 현대 지성인들은 요즈음의 생리(生理)에 맞게 탈지면으로 귀와 코와 입을 막는다. 빨리 부패하지 말고 또 부패물이 밖으로 흘러나와 위생에 해로울가바 하는 좋은 일이다.
3~4천년전에도 솜이 있었고 세균이 발견되었고 의학이 오늘날과 같았던들 밥이나 조개나 엽전을 넣지 않고 알콜에 적신 솜으로 콧구멍과 입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도 옛날의 풍속밖에 모르고 현대의학을 모르는 분들이 그런 행위를 한다고 해서 우몽하다고는 여길 수 있을지 몰라도 마귀장난을 한다고 단죄하지는 못하리라. 신자들이야 물론 그런 우몽한 짓은 할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자상을 차리는 것도 외교인들의 생각으로서는 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죽은 이의 혼이 어떤 사자의 신(使者神)에 의해 저승길로 모셔져 간다는 것을 가상하여 그려낸 것으로,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모처럼 딸이나 아들네 집에 다니러 왔다가 가시면 가마나 인력거나 혹은 요사이 같으면 택시를 불러 잘 모셔다 드리도록 운전수에게 부탁하며 여비를 미리 드리는 것처럼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사람에게 하듯 하라는 효행의 정신에서 있을 수 있는 예식이다.
그러므로 이치에 맞진 않지만 그 본래의 정신은 나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지성인이라면 이런 이치에도 맞지 않는 예식을 멀리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그런 예식을 하는 외교인들을 단죄하지는 않으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 할 것이다.
㉢고복(고復)의 예도 마찬가지다. 죽은 이의 속옷이나 겉옷을 벗겨 지붕이나 높은 언덕에 가지고 올라가서 북쪽을 향하여 남자면 이름을 여자면 자를 부른 후 세번 복, 복, 복하며 크게 외치는 것인데 죽은 이의 혼이 육신을 떠나 나갔으니 그 혼이 제가 입었던 옷을 보고 다시 시체있는 곳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간절한 애정의 표시이다. 옛날사람들은 혼의 세계에 대한 상식이 그정도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런 행위로써라도 허공에 떠나간 혼을 불러들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북쪽을 향해서 부르는 이유는 옛부터 북쪽은 유명(幽冥) 즉 그윽하고 어두운 곳, 죽어서가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망산천 가는 길은…」하며 죽음을 노래했고 칠성판을 섶을 삼아…」 대로 칠성판(七星板)을 시체 밑에 만들어 넣었다. (계속)
李鍾昌(경남 남해본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