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發(개발)되는 農村(농촌)찾아 - 疏外(소외)된 社會參與(사회참여)의 動脈(동맥)] ③ 敎會(교회)와 農村(농촌) ③
농산물가 책정에 노동력은 무시되
농업災害(재해)보장 하나도 없고
도시 福祉(복지)시설 같은 것 全無(전무)
요한 23세께서 「새로운 社會問題」를 지적하고 급한 해결을 요하는 문제 1호로 「불우한 農業部門」을 들었다. 농촌이 얼마나 살기에 지긋지긋한 곳이기에 오늘날 離農이 세계적인 현상으로 등장했겠느냐는 것이다. 鄉村地域의 도로·교통·통신·음료수·주택·의료시설 초등교육·기술 및 직업훈련, 종교생활에 적당한 시설, 오락 및 가정생활을 간다웁게 영위하는 시설 등 도시의 그것과 비교해 보라. 이러고서 어찌 農村人口의 도피를 막을 길이 있겠느냐.
국민의 생활정도가 도시에 사나 농촌에 사나 균형이 잡혀 전국어디서나 전세계 어느 지역에서 별 차이가 없을 때에 인간은 자기 資質과 性趣에 맞는 직업을 자유로이 선택하고, 원하는 직업과 기술훈련을 받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참된 자유가 있고 형제다운 세계가족이 형성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류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국민소득이 균형화 해야 한다. 農業所得이 다른 물가에 비하여 너무 低廉하다. 농산물의 가격 보호가 요청된다. 한 예로 보리농사를 들어보자. 금년도 겉보리 50kg당 매입 가격을 1천1백56원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너무 헐한 값이다. 과거나 현재나 농산물의 가격을 책정할 때 다른 모든 農費는 계산에 넣으나 「人間의 값」 즉 농민의 노동에 대한 댓가를 너무 나 소홀히 하거나 전연 계산에 넣지 않음을 교황께서는 지적하고 있다.
농산물의 가격은 노동력의 댓가를 위주로 책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주장이다. 농산물의 가격은 자본에 대한 보수보다도 노동에 대한 보수라야 한다.
다른 모든 부문에는 保險이 있다. 職場保險 年金 등등. 세탁물에도 觀劇에도 通運에도. 그러나 농민에게는 보험이 없다. 농산물에는 아직 보험이 없다. 흉년에 녹아나는 것은 농민들뿐만 아니다. 도시민도 마찬가지다. 죽어도 보상해줄 사람이 없다. 養鷄家들의 공포는 하루아침에 수천마리의 닭이 몰사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계에 대한 보험은 아직 없다. 농민들이 안심하고 살수 없는 그야말로「運」에만 맡기고 投機를 하는 것이 우리의 농업이다.
農村收入의 統合으로 교황 요한 23세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있다. 즉 농산물의 보존·가공·운반에 대한 봉사가 그것이다. 우리는 귀중한 原料를 低廉한 값으로 팔고 있다. 저장했다가 팔수도 있고 가공을 해서 팔수 도 있고 또 신속히 원거리를 운반해서 팔수도 있다. 농촌본당에서 간혹 농업에 관심을 보인다고 하면 곧 1차 산업적인 농산물을 생산하여 파는 재래식 영농법의 흉내를 내기가 일쑤다. 舊態依然한 농촌생활과 농업을 모방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가 아니다. 진보적이며 지도적인 그리고 선구적인 희생이야 말로 교회가 할일이 아니겠는가. 농촌본당 청년들은 守戒잘하고 問答잘익히고등등 소위착한 신자청년만으로는 부족하다.
농업기술에서도 선두에 서야한다. 사람을 구하는 데는 교리를 잘 알고 洗를 받으라고 권면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농업기술을 연구하고 대화하고 다른 농민들에게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내게 없는 것을 어떻게 줄 것이며 또 무엇을 준단 말인가? 교황께서 가족적인 농업기업구조를 주장하시고 기술원조를 권장하시는 의도를 우리는 잘 이해하고 실행해야 한다. 사랑은 농민의 철학적인 자기향상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향상을 낳는다고 한다.協同組合 4H클럽 등 농민들의 機構에 신자청년들은 적극참여 하고 활동하여야 한다. 가톨릭단체가 아니라고 외면하는 것은 言語道斷이다.
형제들의 모임이 아닌가. 그 속에 그리스도가 생활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앞으로 농촌본당은 영혼의 중심이 아니고 인간의 本鄕, 농민들의 중심처가 되어야 하겠다. 영세와 종부를 청하는 곳에서 인간의 총체적인 구원의 본거가 되어야하겠다. (계속)
金達湖 記(本社論說委員·慶大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