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保存(보존)된 嶺南殉敎者墓地(영남순교자묘지) 巡禮(순례)] ② 晉州(진주) · 進永(진영)
鄭(정) 안또니오의 無頭墓(무두묘)
장례목격한 한 노파 증언으로 발견
朴大植(박대식)=後孫(후손)에 의해 石碑(석비) 세워
具(구) 다두 - 남의 先塋(선영)에 방치돼
■ 晋州
정 안또니오(鄭燦文=字景厚)는 진주동면 허유고개(現 晉陽郡 寺奉面 武村里 中村) 출신으로 그 아내 윤씨의 권면으로 입교 영세하였는데, 1866년 가을 제2단계 교난, 즉 불란서 함대 침입으로 일어난 박해시 음9월 20일에 진주 포교에게 잡혀 혹형에도 굽히지 않았다가 그해 음10월 20일에 용맹히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는 45세였었다.
사형당한 후에 그의 사촌 3형제(再文 · 필문 · _文)가 순교자의 머리는 가져오지 못하고 하체만 거두어 장사를 지냈는데, 지금까지 그의 무덤이 무두묘(武頭墓)라고 전설로 알려져 왔다. 1947년에 진주 문산(汶山)본당 주임이던 서 벨라도(故 徐廷道) 신부가 이 무덤의 내력을 알려고 노력하던차 94세나 되는 별명 「텃골 마누라」라는 노파의 증언으로 정 안또니오의 묘소를 바로 찾게 되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13세 때 외삼촌 집의 아이보기로 있으면서 병인년에 정씨가 진주 포교에게 잡혁다는 것을 목도하였고, 그의 장례 때는 아이를 업고 장지까지 따라가 구경을 했기 때문에 그 무덤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무덤을 파본 결과 과연 무두묘인 것이 판명되었다. 이에 무덤을 새로 봉문하고 1948년 5월 31일에 문산 가톨릭 청년회에서 기념비를 세워 오늘까지 보존해 온다고 한다.
그의 부인 윤씨는 남편 순교후에 시가친족들의 성화에 못견디어 아들 중순(中舜)을 데리고 한많은 「허유고개」를 눈물로 떠나 그 행방이 알 길이 없게되고 지금 그곳에는 순교자의 방계(傍系) 후손 하나가 살고 있을 뿐이다.
구 다두(具)는 함안(咸安) 「미나릿골」 출신으로 언제 누구에게 교리를 배워 영세했는지 자세치 않으나 병인 교난 직전부터 경상도 남부지대를 담당했던 리델 이 신부의 복사(服事=從者)로 있으면서 신부와 함께 거제도(巨濟島)에 까지 들어가 전교하였다. (상무 복사가 아니고 전교시의 임시복사였음)
병인년 봄에 이 신부와 전교를 마치고 서로 헤어질 때는 교난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신부는 대구를 거쳐 충청도 진밭본댁으로 가고, 다두는 진주 본집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진주 포교에게 잡혀 매를 너무 많이 맞고 석방은 되었으나 7일만에 장독(杖毒)으로 23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 순교하였다.
그의 묘소는 가위 분실되었던 것을 함안(咸安)본당 소속 「대산(代山)」공소 회장 윤 바오로가 다두의 처조카인 최성순(崔選淳)이 7세 때에 다두의 아들이 그 부친의 무덤을 사토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과, 그 무덤이 신씨(愼氏)라는 다른 사람의 묘소가 있는 한 벌 안에 있다는 말과, 같은 관내 ’새개(代山面 下基里」에 사는 73세나 되는 노인한테서 역시 신씨의 묘소울 안에 있는 다른 무덤 하나가 진주옥에서 형벌을 많이 받았다가 그 장독으로 죽은 사람의 무덤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신씨의 묘소를 찾아 조사해본 결과, 신씨의 묘는 호손의 손질로 잘 보존되어 있으나 그우편 옆에 있는 묘는 오래 간묘(看墓)하지 않았던 것으로 거의 봉분이 허물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비로소 순교자 구 다두이 묘인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다.
다두의 아들이 전북 장수(長水) 「광대골」 공소 회장으로 있었다 하며, 지금 그 공소 회장은 그의 사위라고 전한다.
■ 進永
박 노렌조(密城朴씨 大植)는 1799년에 진영(現 金海郡 侍禮里)에서 탄생하였다. 그는 4형제 중 둘째였는데 어떤 경위로 입교영세했는지 자세치 않으나 그가 35세 되던 1835년 6월에 형인 대홍(大鴻)과 함께 잡혀 대구 감영으로 넘어와서 혹형 중에 형은 배교하게 되고 대식은 백절불굴의 신앙고백을 하고 투옥되었는데 본시 그는 가산이 넉넉하였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돈을 많이 주어 구명(救命)운동을 하려는데 대식은 그 돈을 형리들에게 주면서 빨리 죽여달라는 속결(速決)운동을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해 음8월 27일에 순교하였다.
그의 유족들이 돈을 많이 주고 순교자의 목과 동체를 찾아내어 베로 염습하고 본 고향 진영으로 운상하여 선영(先塋)에 안장하려 햇으나 가문 인족의 반대로 묻지 못하고 「챗골」(茶洞)에 매장하였다.
그의 유족에는 아들 도마, 손자 바오로가 있었는데, 지금 그들은 다 고인이 되고, 증손 마디아(桓遂)는 지금 진영 사거리(四巨里)에 살고 있고, 둘째 비오(鍾儀)는 지금 부산시 청학동(靑學童)에 살고 있다. 그들은 가문의 반대와 학대 때문에 본고장에 살지 못하게 되었다가 지금에 와서 위와 같은 주소에 거주하게 되었다 한다. 그들은 작년 4월 15일에 십만원을 들여 높이 4척의 석비를 세워 거룩한 순교 선조의 불휴한 영예를 기리 기념하고자 하였다.
그 제막식에는 그곳 본당 유 신부가 야외 미사를 드리고 성대한 식전을 거행하여 순교자의 교명 미상을 노렌조로 하여 비석에 새기도록 하였다 한다.
그런데 그가 순교한 동기는 알 수 없다. 1835년에는 서울과 충청도 몇곳서 교인을 잡아 죽인 사실이 교회사에 있는 것으로 보아 혹시 대식의 순교도 그같은 때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金九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