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3년전 1925년 7월 5일 오전 10시 「로마」의 성 베드로대성전에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큰잔치가 벌어졌다. 즉 우리 한국의 만여명 치명자 중 79분을 복자로 공경하도록 교황 삐오 11세께서 전세계에 공포하신 뜻 깊은 순간이었다.
그 후 1949년 교황 삐오 12세는 우리 순교복자들 가운데서 오직 한분인 첫 한국인 신부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을 한국의 모든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하고 매년 7월 5일을 그 축일로 택했다. 그뿐 아니라 7월 5일 다음에 오는 주일에 김 신부님을 위한 미사를 드리고 외부 행사를 함으로써 김 신부님의 성덕을 본받고 그 전구를 구하도록 격려해 주었다.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우리가 잘 아는 충청도 솔뫼에서 탄생하여 15세에 「마카오」에 건너가 신학생이 되었다. 거기서 5년 동안 성덕과 학업에 전력을 다해 6개국 말을 습득하고 1845년에 부제품을 받은지 보름만에 의주 변문을 거쳐 갖은 고생 끝에 그리운 조국 땅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주의로 인해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출입국을 엄금하여 외국사람과 상종하는 것을 큰 죄로 몰아 만일 발각되면 사형에 처하였다.
유학사상의 고루한 인습에 젖어 서학을 사학으로 규정하고 박해하던 그 시절 많은 죽을 위험을 당하면서 안드레아 부제는 서울까지 숨어들어와 여러가지 교회 사정을 알아보았다. 또 부친 이냐시오가 7년전에 이미 치명하였고 모친 우르술라가 홀로 남아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음을 알고도 자기의 입국이 관헌에게 발각될까 저어하여 끝까지 어머니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눈물을 머금고 인천앞바다에서 조그마한 목선으로 상해를 향해 조국을 다시 떠났다.
모진풍파가 잦은 황해바다를 조그만 목선으로 떠나는 자체가 커다란 모험이었으나 열렬한 기구의 효험이 있어 안드레아 부제가 탄 배는 구사일생으로 중국배를 만나 한달만에 다 파선된 배를 이끌고 지친 몸으로 상해에 도착했다.
여기서 안드레아 부제는 고 주교님을 만나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깅가함」신학교에서 사제서품을 받으시니, 이때가 1845년 8월 17일로, 안드레아의 나이만 24세 때였다. 이로써 우리 한국에도 처음으로 우리 한국인 신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신부가 된지 두달만에 다부서진 배틀고쳐 고 주교님을 모시고 상해로 출발하여 또다시 풍파와 싸운지 한달만에 제주도의 한 모퉁이에 닿아 지금의 강경을 통해 육지에 오르신 때는 인천 앞바다를 떠난지 일곱달 만이었다.
그곳에서 신자들을 만나 고 주교님을 모시도록하고, 자신은 서울 근처에서 전교를 시작하였다. 한국 신부를 맞아 아무런 말의 불편도 없이 교리를 배우고 성사를 받게 된 신자들의 그 기쁨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러나 그 기간도 오래 가지를 못했다. 이렇게 전교하기 넉달만에 조기잡이 하러온 중국의 선원을 통해 편지를 보내려다가, 포졸에게 발각되어, 사학과수라는 죄목으로 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서울에 압송된 후 그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칼을 받아 순교하니 그해가 1846년, 나이 만25세로 신부된지 1년 1개월이었다. 이상이 간단한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이다.
돌이켜보면 122년전, 우리 한국인 첫사제 김 신부는 서양의 신 사상과 문화를 담뿍 흡수하고서도 그 웅지를 펴보지 못한 채, 우리민족을 하느님의 품안으로 이끌어 들이려면 거룩한 뜻도 별로 전하지 못한 채 우리정부 요인들의 「소중화(小中華)의 공자(孔子)」라는 찬미를 받으면서도 마침내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당시의 순교장면을 잠시 살펴보자. 기치창검한 수많은 군대가 앞서나간 후 뒷짐지워 결박된 사형수 김대건 신부는 짚으로깐 들것에 앉히어 구경꾼에 둘러싸여 새남터로 나아갔다. 마침내 현장에 이르자 좌깃대를 에워싸고 둥그렇게 진을 친 군대속으로 인도되었을때 대장은 『외국인과 상종한 죄로 죽인다』고 선언한다. 이때 뒷짐지원 묶인 김 신부는 소리를 높여 『여러분 죽는 순간에 선 내말을 귀담아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상종한 것은 오직 내가 믿는 종교와 내가 위하는 천주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을 위해 죽기 때문에 내게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한자가 되고 싶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오』 이렇게 말하고 그는 태연자약하게 형리들을 바라보며 『내 몸을 이렇게 하면 칼로 치기가 편리하냐?』 『예, 그만하면 되었소. 인제는 되었소』 『그러면 어서쳐라. 나도 죽을 각오 다했다』고 말했다.
일찌기 사도 성 바오로는 자신있게 『나는 옳은 싸움을 싸웠으며 달릴곳을 끝까지 달렸으며 신앙을 보존하였노라. 지금은 오직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나니 공의로운 심판자이신 주 저날에 이를 내게 주실 것이며…』(띠모테오후서 4:7-8)하였다. 김대건 신부도 이와 같이 명백하고 자신있게 단언하였다. 『…내가 지금 죽는 것도 그분을 위해 죽는 것이며 지금 내게는 영원한 생명이 곧 시작되오』 우리도 이렇게 좋은 표양을 보여주어 빛이 되고 소금이 될 때 『행복한자가 되고 싶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오』하고 호소한 김 신부님의 마지막 애원이 이루워 지리라.
이계창(충남 서산보좌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