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17) <第二話(제2화)> 榮光(영광)의 敗北(패북) ③
발행일1968-06-30 [제624호, 4면]
『미안하오. 용서하시오. 그렇지만 내게 그만큼 절박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오해하지 말아주오.』
윤 사장은 정중히 고개를 수그리었다.
『흥, 참 기가 막혀서. 대낮에 여자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사정은 무어고 오해는 또 다 무어에요. 이 이상 더 추군 거리다가 크게 망신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세요.』
처녀는 매우 분한 듯이 독이 오른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러나 윤 사장은 처녀의 얼굴을 가까이 대해보고 더욱이나 몸이 달아오른다.
『그렇게 노하는 것이 조금도 무리가 아니라고 나도 생각하오. 잠시도 아니고 먼데까지 짓궂게 따라 왔으니 어째서 불쾌하지가 않겠오.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 그런 거요. 설마하니 나이 많은 내가 딴 생각을 가지고 따라오기야 했겠오. 그러니 오해말고 잠시만 조용히 좀 만나 줄 수 없겠오?』
윤 사장은 부드러운 말씨로 점잖게 간청한다.
『글쎄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마는 보시다 싶이 저도 어린애가 아닌데 그렇게 추군추군하게 따라 오는 법이 어디 있어요. 더욱이나 젊은사람도 아니고 나이 지긋한 분이 그게 웬일이어요. 눈치를 채고 뛰어가서 차를 잡아탔으면 그만 단념하고 가실일이지 그렇게 끝까지 철저하게 따라오는 사람은 처음 보았어요.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마는 그건 말을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빨리 돌아가세요.』
처녀는 날카롭게 소리치고는 그대로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았다.
『아니 잠깐만 잠깐만…』
그런대로 윤 사장은 더욱 열을 내어 뒤를 따른다. 숨이 차고 이마에 땀이 솟았지마는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글쎄 왜 이렇게 성가시게 굴어요. 정이러시면 그냥 있지 않겠어요. 저는 지금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어요. 바쁘게 갈데가 있는데 이렇게 엉뚱한데 까지 오게 되어서 큰 낭패란 말이어요.』
처녀는 마침내 또 우뚝 멈춰 서서 윤 사장을 흘겨보았다. 그 흘겨보는 얼굴과 몸매가 참으로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그것을 보고 윤 사장은 더욱이나 처녀에 대한 관심이 커져간다.
『아니 그럼 여기가 집이 아니고 엉뚱한데 였단말이오. 그래 나 때문에 공연히 여기까지 온거란 말이오?』
『그렇지 않구요. 대낮에 모르는 사람이 끈덕지게 따라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 사람 공연히 고생시키지 말고 어서 돌아가세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지금 몹시 바빠요.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처지가 못된단 말이어요. 』
『허허…. 그야 나도 시간이 많고 할일이 없어서 이렇게 따라온 건 아니오. 나도 알고 보면 매우 바쁜 사람이오. 아니 나보다 더 절박하게 시간에 몰리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윤 사장은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이 처녀의 심정을 더욱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바쁜 분이라면 볼일이나 보실 일이지 왜 젊은 여자애들의 뒤를 따라다니세요?』
『글쎄 그 말은 아까하지 않았소. 내게 어떤 깊은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잠시만 조용히 만나달라고.』
처녀는 새삼스럽게 윤 사장의 위아래를 쌀쌀한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좋아요. 그럼 여기서 말씀하세요.』
『그래 그 깊은 사정이라는게 대체 무어지요?』
『그렇게 간단히 할 말이라면 이렇게 먼데까지 따라 왔겠오. 이야기 해보면 알테니까 어디 조용한데로 잠시 가줄 수 없겠오. 그래서 만일 내가 실례를 했다며는 사과는 얼마든지 하겠오. 내가 나이 먹은 사람이 체면이 아니지만 나는 지금 그런 체면같은 것을 가릴 겨를이 없오.』
『참 기가 막혀서…. 나는 선생님을 전혀 본 일도 들은 일도 없는데 무슨 말씀이 그렇게 장황 하시지요? 혹시 사람을 잘못 보고 그러시는거나 아니세요?』
너무 기가 막힌 듯이 처녀도 입가에 웃음을 띄었다. 처녀의 웃음을 보고 윤 사장은 힘을 얻어서 한걸을 닥아섰다.
『처녀의 이름이 무엇이오? 실례지만 성명을 좀 말해주지 못하겠오?』
『그건 알아서 무얼 하려고 그러시죠? 까닭을 먼저 말씀하세요?』
처녀는 버티어 서서 눈을 흘기었다. 그의 입가에 떠올랐던 웃음은 어느틈엔가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사실은 사람을 찾고 있오. 나는 두달전에 외국에서 돌아왔오. 이십년만에 외국에서 돌아온 사람이오. 벌써부터 사람을 찾고 있는데 도무지 찾을 도리가 없구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동안 조국은 전란을 겪어서 모두 뒤죽박죽이 되었오. 그래서 찾는 사람을 찾을 도리가 없는 것이오. 오죽하면 지나가는 처녀를 체면 불고하고 이렇게 뒤를 따르기까지 했겠오.』
윤 사장은 말꼬리가 떨리었다. 수건을 꺼내서 그는 이마의 땀을 씻었다.
『그게 사실이신가요?』
처녀는 윤 사장의 심중을 점치려는 듯이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사실이고 말고,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오. 나는 시간이 없는 사람이오. 한시 바삐 그 사람을 찾아야하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오직 그 사람을 찾기 위해서 고국에 돌아온 것이오.』
『그렇다면 왜 하필 저를 보고 따라오셨지요? 선생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저 같은 젊은 처녀셨던가요?』
『그렇지는 않소. 허지만 처녀의 모습이 내가 찾으려는 사람의 젊었을때 모습과 똑같소. 아니 같을 정도가 아니라 꼭 한사람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이오. 그래서 처녀의 모습을 보자 염치불구하고 이렇게 끝까지 따라온 것이오. 부디 내 말을 허수히 듣지 말고 대답해 주오. 만일 내가 잘못 보았다면 손이 발이 되도록이라도 빌겠오.』
윤 사장은 수건을 쥔 손을 가슴에 대고 애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