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訪(탐방)] 3천명의 靈父(영부) 石鍾寬(석종관) 神父(신부)
68세의 老益壯(노익장)
23년만에 귀국
재일교포 유일의 한국인 지도신부
한국인으로는 첫 방지거 회원
長崎(장기) 原爆(원폭) 속에서 3백여명을 구령
프란치스꼬회 소속 석종관(石鍾寬=바오로) 신부가 23년만에 일본에서 홀연히 한국에 돌아왔다. 「東京 韓國가톨릭信者 指導神父」라는 명함을 내놓는 석 신부는 1899년 생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곧이 들리지가 않는다. 만으로 따져 68세이고 우리식으로 따지면 70노인이 아닌가?
고 최덕홍(崔德弘=大邱) 주교와 대구대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라니까, 우리나라에 있으면 조용히 은퇴 아닌 은퇴생활을 해야할 처지인데, 아직도 손수 차를 몰고 다닌다니 그 정력이 대단하다.
『내가 알고있기에는 우리 교포중 약 3천명이 영세자인데, 성당에 아노는 사람은 겨우 2할이 될까 말까 하는 정도입니다.
재일교포와 그 2세의 구령문제는 아주 시급한데, 손이 모자라서 도저히 일을 해나갈 수가 없읍니다.』
석 신부의 이러한 호소는, 7순에 접어들어 기력이 모자란다는 뜻만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었다.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60만 재일교포를 상대로 지금가지 버티어 왔다는 사실 자체가 초인적인 정력가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1944년, 재일교포의 지도신부로 부임하였으나, 몇달안가서 일본이 항복하고, 한국과의 공식 연락이 두절되자 석 신부는 글자그대로 고군분투하였다.
『내가 수사신부 된 이야기를 할까요?』
원자탄이 투하될 때 석 신부는 나가사끼(長崎)에 있었다. 불이 번쩍하더니 삽시간에 온 도시가 수라장이 되었고 사람들이 즐비하게 넘어졌다.
석 신부도 거꾸로 박혀 정신을 잃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부상입은 줄도 모르고 넘어진 사람을 하나 하나 들쳐가며 종부성사를 미신자에게는 임종대세를 주고 다녔다. 1주일동안 무려 3백여명이 석 신부의 힘으로 영혼을 건졌다. 그 많은 사람들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두명 뿐이었다.
『그 일을 치루고 나서 나는 곰곰히 생각했읍니다. 주의 안배로 내가 살아났으니 남은 여생을 수도자로 보내야겠다』
동경주재 교황대사를 찾아가서 프란치스꼬회에 들어가도록 허락을 청했으나 한국교회의 허락이 앞서야 된다고 절차의 미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석 신부의 열의는 『사후 인준을 받아온다』는 조건으로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허락을 받고야 말았다.
이렇게 해서 석 신부는 한국 최초의 프란치스꼬회 수사신부가 되었다.
『내가 일본서 가장 인상깊었던 일은 영친왕 이은(李垠=요셉)씨의 구령입니다. 1961년에 영세 입교시켰고 2년후에는 견진성사까지 받게하였읍니다. 부인 마사꼬(方子) 여사는 이해깊고 교양있는 좋은 분입니다.』
석 신부는 석달동안 머무르다가 11월에 일본으로 다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