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敎會議(주교회의) 決議外(결의)와 非基督敎(비기독교)와의 對話(대화)
敎理(교리)·儀式(의식)·思考方式(사고방식) 등
土着化(토착화) 姿勢(자세) 먼저 確立코
排他(배타) 아닌 相互理解(상호이해)·尊重(존중)·協力(협력)을
「아죠르 나멘또」 즉 현대화라는 기치를 높이 치켜들고 출범했던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첫출발점에서 의도했던 대로 소기의 목적을 십이분 발휘하여 현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포부를 안겨주었다. 교회는 우선 자기자체를 되돌아보는 교회관, 자기가 살고 있는 현대관, 인간관 기타 여러가지 중요한 문제를 재검토하여 모든 면에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원칙과 태도를 천명하였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총결산인 16개의 헌장과 선언, 그리고 율령들은 이런 시대와는 달리 남에게 대하여 도전적이 아니고 평화적이며 자기를 방위하는 호교론을 펴지아니하고 구체성을 띤 사도적 품위를 드러내 보였다. 특히 현 교회가 취한 태도중의 특징은 타종교에 대하여 단죄하는 자만(自慢)을 버리고 서로 초대하고 초대받는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고 자기 자신의 문호를 완전개방한데 있다. 특히 비그리스도교 선언은 대화로써 인간의 공동 목표를 실현하고, 협조로써 인류복지를 실천하자는 제안으로 우리나라와 같은 비그리스도교국 국민에게 큰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이 선언문은 공의회가 발표한 16개교 중에서 가장 짧은 것 중의 하나이다. 교회의 폭넓은 도량을 보여주는 중대한 문헌이다. 5개 항목으로 되어있는 이 교령은 첫째 서론, 둘째 여러가지 비그리스도교적 종교, 세째 회회교 네째 유태교, 다섯째 민족주의를 각각 취급 한다. 우리나라는 사실 종교적으로 보면 회회교국도 아니요, 유태교국도 아니요, 또 민족주의를 종교로 삼는 나라도 아니다. 율령 제2항의 여러가지 종교에서 불교를 취급하지만 우리나라가 불교국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적으로 따지자면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의 수가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공의회가 우리나라 같은 상황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더라면 아마 비신앙 선언 같은 제17의 교령을 추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비그리스도교 선언의 서론이나 내용의 정신은 비신앙인에 대한 태도와 자세로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퍽 다행한 일이다.
모든 민족은 그 기원과 목적에서 하나의 공동체이며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 같은 인간조건하에서 공동의 의문점을 지니고 그 해결을 위하여 머리를 짜내고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 「삶의 뜻은 ___ 찾아야 한다.」 「선은 무엇이며 악은 무엇인가?」 「왜 인간은 고통을 받아야 하며 고통은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가?」 행복 죽음 후세 등 인간존재의 기본적인 문제를 놓고 모든 사람은 공동으로 같은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비그리스도교 선언의 이와 같은 대원칙을 지침삼아 비그리스도교적 사회에 사는 우리의 가톨릭적 태도와 자세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로서의 문젯점이 허다하게 많다.
오직 하나인 진리의 교회로 자부하는 가톨릭교회의 교리제시가 과연 대중의 수긍을 얻을 수 있는가? 2천년 동안의 전통을 지닌 그리스도교 윤리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확고부동하는 인간윤리로써 통용될 수 있는가?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교의 대헌장인 성경이 「서양책」이라는 편견없이 읽혀질 수 있는가? 등 굵직굵직한 문제에 곁드린 부수적인 문제들은 허다하게 많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너무나 무리하게 밀고 나가지나 않았는지? 진리의 힘은 「불도저」식으로 밀고 나가는데 있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에 부드럽게 며드는데 있다.
진리의 힘은 겨자씨처럼 아무데나 떨어져도 자라 익어가지고 백배 천배의 작은 알맹이를 사방에 뿌리는데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복음이 퍼지는 양을 겨자씨에 비기셨다. 겨자씨는 자기실력대로 결실하여 사방에 뿌릴뿐 돌밭과 가시덤불 외에는 어디나 자랄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시덤불은 자기가 번성하기 위하여 폭력으로 남을 덮어 버린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민에게 기쁜 소식이요,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반대의 진리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을 언제어디서 어떻게 전하느냐가 문제이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가졌다 해서 교회가 도도하게 남을 대할 필요는 없다. 가톨릭교를 믿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지금까지 「외인」이라 불러왔다.「우리밖에 있는 사람」 좀더 심하게 「구원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외인」한 사람이 하루는 자기는 성당엘 얼마 나아가다가 「예수교」를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성당에 가면 그 교리배우는 것이 큰일이요, 신부의 강론은 아무리 들어보아도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만민을 위하여 하늘이 주신 진리가 왜 이다지도 어렵게 표현되었을까? 진리의 사도직을 맡은 신부의 설교가 왜 알아듣기 힘이 들까? 교리서를 우리네 사고방식으로 알아듣기 쉽게 그리고 배우기 쉽게 만드는 일 교리서의 원천이되는 성경을 참 우리말로 옮기는 일, 이것은 우리가 무슨 댓가를 치루더라도 해놓아야 할 시급한 일이다. 현대화란 덮어 놓고 서양물결을 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대로의 현대화가 있어야하겠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 성경번역사업을 못할 지경이면 한 교구를 팔아서라도 해야한다』던 대신학교 성서교수의 말씀이 자꾸만 되씹어진다.
白敏寬(가톨릭大교수신부·본사論說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