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藝時評(문예시평)] 「두겹 월계관」…傳記內容(전기내용)의 平易(평이)한 記述(기술) / 무르익은 感性(감성)의 「에스프리」…「聖母昇天(성모승천)」
自處(자처)하는 美德(미덕)보다 虛僞(허위)의 惡德(악덕)으로서의 人間學的(인간학적) 密度(밀도) 아쉬워
계속되는 不況 속에서도 최근의 몇篇 작품은 우리의 가톨릭 文學을 展開하는 데에 좋은 反省의 資料가 됨직하다. 이 몇 편의작품은 詩에서 李錫鉉씨의 「두겹 月桂冠」(가톨릭시보 8월 20일자) 소설에서 안톤 체홉의 「밤의 散策」(가톨릭청년 9월호)이다.
李錫鉉씨의 長詩 「두겹 月桂冠」에는 「殉敎者 聖 세바스띠아누스」라는 副題가 붙어있다. 이 詩는 聖 세바스띠아누스가 「로마」의 으뜸가는 武士이며 近衛仕官으로서 가톨릭에 歸依하여 스스로 참형을 당해 죽는 歷程을 詩化한 것이다.
그러나 이 詩는 하늘 열매를 / 주렁주렁 따들인 / 충직한 농군이기도 하였거니 정도가 詩的 「이미저리」의 驅使일뿐 전체적으로 세바스띠아누스의 傳記的 內容의 평이한 記述이다.
그리하여 이 詩에서는 때는 第4世紀 문턱 / 여기는 빨라띠노 王宮. 시간은 흘러 흘러 / 그 무덤이 바로 오늘의 바실리까 세바스띠아노 등의 표현으로 무대의 空間과 時間을 밝히기도 했다.
비록 長篇이지만 이 詩는 敍事詩가 아니었다. 敍事詩의 경우라 해도 詩는 「이미지」의 구성에 의해 재창조되는 濃度 짙은 眞實이어야 할 것이다. 「두겹 月桂冠」의 경우 作者의 線 굵은 의욕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매우 안이한 작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비하여 金南祚씨의 「聖母昇天」은 기뵤적 圓熟의 경지에 이른 작품이라 하겠다.
눈물 안에, 그리고 작은 소망이나 먼 기다림들이
첫봄 軟柔한 바람같이
커가는 곳에
나직한 말씀조차 아니고
보다 五妙히 그 위로를 감추시는
달고 뜨거운 默言으로
이렇게 이 시인은 昇天한 聖母가 無時로 우리에게 臨하는 사랑을 찬탄했다. 어머니 이 놀라운 사랑이 웬일입니까. 이것이 詩의 結句이다.
그러나 이 詩에서도 우리는 더 욕심을 부릴 수가 있을 것 같다. 비록 무르익은 感性의 「에스프리」 속에서이지만, 눈물 안에 달고 뜨거운 놀라운 사랑이 웬일입니까. 하는 詩의 思想은 자칫 「센치멘탈리즘」에 접근할 우려를 느끼게 한다.
文學은 아무래도 가장 어려운 「眞實의 수단」일 것 같다.
그것은 사랑을 그냥 사랑이라, 기쁨을 그냥 기쁨이라 할 때 그 의미를 오히려 엷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가 쉽다. 그 사랑에는 아픔이 배어있고 그 기쁨에도 가슴 떨림이 나타나 있을 때, 그리하여 自處하는 美德이기보다는 오히려 虛位의 惡德일때 우리는 보다 진실한 人間學으로서 文學의 密度를 느끼게 된다.
체홉의 소설 「밤의 散策」은 또 다른 類의 작품이다. 체홉은 원래 社會의 뒷길에 時角을 펴는 「憂愁의 리얼리스트」였다. 「밤의 散策」은 異例의 감상적인 小品인 것 같다.
神學生 웨리코보르스키는 추운 겨울밤 과부 와시리사의 果樹園에 들른다. 거기서 웨리코보로스키는 베드루가 닭 울기전에 세번 예수를 배반한 얘기를 꺼낸다. 와시리사는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이 와시리사의 울음을 보고 神學生은 생각한다. 사람으로부터 사람에게로 이어져 나가는 久遠한 진실의 歷史를.
물론 歷史와 그 의미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연결되어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연결은 復古的이거나 下向的인 연결이 아니다. 그것은 全時間 속의 同時的 秩序여야 한다.
歷史 속의 下向的 眞實에 着眼한 印象이 있는 「밤의 散策」은 그 「플로트」의 단순성까지 겸하여 결국 감상적인 小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작품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작품에 대하여 라게르크비스트의 「바라바」같은 작품은 훌륭한 敎示를 던져주고 있다.
바로 예수 대신으로 十字架에서 풀려난 도둑 바라바의 고뇌를 통하여 가게르크비스트는 현대인의 心底에 깃든 회의와 고독을 그리고 거기서 다시 蘇生하는 사랑의 영혼을 창조하기에 성공했던 것이다.
우리는 宗敎와 文學의 照應關係에 있어서 『진리는 神의 照明에 의해서만 부여된다』는 단순한 前提를 벗어나서, 인간이 구체적 현실을 檢證한 결과로써 神의 照明 아래 들어가게 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認識論을 採用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은총의 藝術的形象化에 안이와 「센치멘탈리즘」과 단순성 등 短見의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 같다.
具仲書(文學評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