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保存(보존)된 嶺南殉敎者墓地(영남순교자묘지) 巡禮(순례)] ③ 巨濟(거제) · 蔚山(울산)
眞木亭(진목정)서 25세에 絞殺(교살)
尹鳳用(윤봉용) … 玉浦(옥포)로 移葬(이장)
許仁伯(허인백) · 李陽登(이양등) · 金宗倫(김종륜)
조아 夫人(부인), 머리 · 동체들을 치마폭으로 날라 暗葬(잠장)
■ 巨濟
윤요셉(尹鳳用)은 양산(梁山) 출신으로 거제도(巨濟島)의 사도인 윤 다니슬라오의 아들이다.
그는 1864년 즉 병인교난 직전에 탄생하여 3·4세 될 때는 교난이 치열하던 중이라 그 어머니 등에 업혀 이리저리 피난 생활 속에서 자랐다. 그가 무슨 동기였는지 우리나라가 각국과 수호조약을 맺고, 오랫동안 문제되어 오던 한 · 불 조약이 비준(批准)되던 1888년 2월에 거제 부사(府使)의 호출로 관전에 들어갔다가 태형을 당하고 사학의 괴수라는 지명을 받아 당시 경상 우수영(右水營)이 있던 통영(統營)으로 이송되어 무수한 매를 맞고 진주(晋州)목사(牧使) 아문으로 이송될 때 양쪽 발에 칡넝쿨을 매어 끌려가는데 칡넝쿨에 살리 헤어져 피를 많이 흘렸다 한다.
진주에서도 여러번 혹형을 당하다가 교살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25세였다 한다. 그의 시체를 진주 「비라실」(長在洞) 회장이 거두어 매장하였다가 그후 10년만에 옥포본당 복사 성(成) 바오로가 성당 앞 산으로 옮겨 지금까지 보존해 온다.
당시 그의 유족으로는 부인 진 펠리치따와 아들 누까(學松)와 딸 가다리나(松學)가 있었다. 이제 그들은 다 고인이 되고 후손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가 잡힐 때 살던 곳이 진목정(珍木亭=現 玉浦성당 있는 마을)이엇는데 순교후에 그 고장 사람들이 천주학군이 살다가 죽은 불길한 이름이라 하여 국산(菊山)이라고 고쳐부르게 되었다 한다.
■ 蔚山
허 야고버(許仁伯)는 김해 출신으로 21세때 입교 영세하고 나서부터 자선(慈善)사업과 애인지덕을 닦기에 부지런하였다. 1866년 교난시에 김해 본관 포졸에게 잡혀 혹형을 당하다가 여중 호걸인 그 부인의 민활한 활동으로 다소의 금전을 주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연달아 치성해지는 박해를 피하여 가솔을 데리고 언양(彦陽)으로 피하여, 대재(竹嶺)라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살았다.
거기에는 교우 부락이 있어 그곳 회장이던 이 베드루(李陽登)와 훨씬 전에 언양현감으로 와 있었던 김휘빈(金휘彬)의 손자로서 공주에서 상주로 피난하였다가 이곳으로 피난해 온 김 누까(金宗倫)를 만나게 되어 이때부터 세 사람이 함께 순교할 때까지 동일한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그들은 점점 포졸들의 포승이 가까운 것을 짐작하고 모두 가솔을 데리고 더욱 깊은 산골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의 석굴을 발견하여 거기 피난처를 정하였다. 구름도 쉬어가고 호랑이 외에는 길짐승도 잘 깃들이 않는다는 이곳까지 악마의 발톱이 할길줄을 위 알았으랴! 하루 낮에 세 사람은 경주 포졸들에게 일망타진되어 경주로 끌려갔다.
허 야고버의 부인 조아는 아이들을 범이 개끓듯 하는 산중에 버려두고, 남편의 뒤를 따라 경주로 가서 그들이 순교하는 날까지 옥사링에 음식을 빌어다가 공궤하며 만단의 편의와 눈물겨운 권면을 하였다. 한달이 지난뒤에 그들은 울산병영으로 이송되어 1868년 8월 14일(음7월 28일)에 장대에 끌려가서 참수되었다.
허 야고버 부인 조아는 세 사람이 용감하게 순교하는 것을 목도하고 기뻐하면서 미리 적당한 곳을 보아두었다가 밤들기를 기다려, 형장으로 몰래 들어가 먼저는 세 분의 머리를 치마폭에 싸서 매장할 곳에 갖다두고, 또 가서 세분의 시체를 업어서 가져왔다. 용감무쌍한 여호걸은 세 분의 시체를 각각 머리오 맞추어 묻고 표를 해두었다.
후에 박해가 끝나고 정부는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게된 후에, 고종왕의 하명으로 순교자의 시체를 그 유족들에게 내어주어 안장케 하라는 조치에 부인 조아는 세 분의 시체를 경주 산내(山內) 진목정(眞木亭) 도산으로 이장하였다.
1932년 5월 28일에 그 세분의 존귀한 유해를 대구시 월배 감천리(月背 甘川里)교회 묘지로 이장하였다가 1962년 10월 25일에 묘지 상상봉에 모신 성모상 앞에로 또다시 옮겨 보시고 훌륭한 기념비를 세웠다.
(끝)
金九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