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仰은 古今東西를 통해 누구를 믿는다는 根本的인 面에서 同一하다. 信仰은 抽象的이 아닌 具體的이며 實存的인 어떤 「누구」를 믿는가이다. 그러나 古代人과 現代人의 信仰, 農村과 都市人, 男女와 知性에 따른 信仰의 質은 다르다. 왜냐하면 信仰한다는 것은 主觀的이기 때문이다. 信仰의 對象이 같고 共通的인 点을 排除하지 않으면서도 생각이나 嗜好, 民族性, 人間의 性格, 環境의 差異, 時代性, 文明과 그것의 進步度에서도 그렇다.
▲編輯者 註=이 글은 7월 25일부터 동 30일까지 계속된 마산교구 평신자 강습 중 노 신부의 강연 요지이다.
■ 社會的信仰과 個人信仰
다른 한편 信仰을 갖는데는 家族 · 環境의 壓力이나 影響이 原因인 境遇도 있다. 이같은 社會的 信仰形態가 現代에 와서는 個人的 信仰으로 顯著히 變遷(發達)해가고 있다. 이 社會的 信仰은 自己에서 出發했거나 바탕을 둔 것이 아니며 自發的인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런데 韓國의 가톨릭 信者 中에는 社會的信仰形態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비근한 例는 故鄕에 있는 동안은 聖堂엘 가면서도 都市나 他鄕엘 가면 冷淡해 버리는 理由中에는 信仰의 主體性 缺如라는 理由나 都市의 文明(라디오 · TV) 환경 속에서 自己의 社會的信仰을 喪失해 버린다는 理由들 때문이며 常存하는 大家族社會制度와 儒敎 등 東洋的思想이나 傳統의 影響에서다.
上述한대로 現代信仰이 社會的인 것에서 個人的인 것에로 옮겨지면서도 우리가 社會的 도움을 必要로 하듯 現代生活에서도 社會的 形態의 信仰을 完全히 排除할 수는 없다. 왜냐면 굳건한 個人信仰의 바탕을 集大成한 社會的 信仰을 無視할 수 없을 뿐더러 그것은 바로 희망이기 때문이다.
또한 公議會가 밝혔고 福音的 精神이 救援의 意義를 社會와 共同體的 救援, 人類의 救援을 指向하고 强調했다는 点에서도 그렇다.
■ 意味와 보람
信仰이 『내게 무슨 보람을 주는 것인가?』라는 質問이 現代人의 信仰의 出發點의 하나이다.
韓國가톨릭은 從前까지 現世가 아닌 來世만을 강조했고 죽은 후의 天國만을 漠然히 믿는 現世忌避 혹은 無視의 信仰을 가르친 傾向이 짙다. 이같은 事實은 消化를 시키지 못할 큰 사과를 통채로 삼킨 것과 다를 바 없다.
信仰이란 意味와 보람을 내게 直接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意味에서 實存主義哲學은 信仰生活에서의 意味를 追求하는데 寄與했다.
豫備信者들이 『믿어 보겠다』 혹은 『聖堂에 다녀보겠다』는 말을 한국에서는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말을 西洋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말이며 번역도 할 수 없는 말들이다. 西洋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말이며 번역도 할 수 없는 말들이다. 西洋人의 思考로는 「믿으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兩者擇一뿐이기 때문이다. 前述한 대로 信仰은 主觀的이기에 될지 안될지 試驗해본다는 생각은 語不成說이다. 그것은 「나」의 意義가 確立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東洋的 思考方式에도 哲學的意義를 內包한 또다른 意味深長한 것을 發見할 수 있다. 그같은 思考는 믿어보고 그것이 내게 무엇을 意味하는지를 硏究해 보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傳敎(布敎) 方法으로 現代人의 生活 「무드」에 맞취 信仰이 무엇을 의미하고 보람이 있는지를 깨우쳐 주는 것도 좋다.
그러나 人生의 의미와 보람의 探究는 人間中心主義的 思考나 人生觀으론 解決할 수 없다.
人生은 스스로의 힘 以上의 神이 解決하는 것이며 「의미와 보람」의 解答은 신과 人間關係의 認識과 「深化度」 바로 그것이며 福音三德인 順命 · 淸貧 · 貞潔的인 奉仕生活이 의미와 보람에 回答을 주는 것이다.
■ 信仰의 進步(開發)
信仰生活에서 의심을 갖는 것을 위태롭게 생각한다. 修道者 · 神父 · 主敎 · 敎皇은 信仰에 疑問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事實은 그렇지 않다.
信仰하는 것 중의 의심이나 고민꺼리는 오히려 『어두운대서 밝은 빛을 向하는 現象』임을 알아야 한다. 이같은 課程을 거쳐 事實은 信仰이 進步하고 開發되는 것이다. 敎理硏究는 信仰開發의 基本作業이다. 그러나 敎理知識의 蓄積이 信仰自體이거나 개발은 아니다. 知識을 認識하고 體驗함으로 신앙을 深化해야 하는 것이다.
신앙의 進步는 신앙안에서 깊은 人生의 意義와 나를 神과의 關係에서 認識하고 깊이 하는 것이다. 마치 電熱器의 「코이루」線이 電熱의 加熱로 더 밝고 熱을 내는 狀態와 같은 進步를 말한다.
■ 批判的 信仰
敎會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통채로 먹는 식에서 脫皮할 必要가 있다. 例컨대 西歐生活에서 發端한 金曜日의 禁肉制度이다. 禮節에서도 本質的으로 不變的인 것, 어람의 可變的인 것과 거의 自由롭게 밖루 수 있는 것 등의 - 嗜好 · 傳統 · 風習 · 文化的인 面에서 - 區分도 그런 것이다.
盲從은 狂信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런 식의 信仰告白行爲를 바라지 않는다. 啓示問題에서도 같다. 本疾을 歪曲한, 解說課程서의 變質을 看過한 承服은 올바른 信仰行爲가 아니다.
■ 行動的 信仰
하느님과의 直接的인 對話를 하는 機會인 미사 · 聖事參與나 祈禱行爲는 率直하고 純粹한 나와의 산 對話여야 한다. 規律의 준수도 마찬가지다. 形式的 · 機械的 · 習慣的 行爲여서는 안된다. 聖堂 안에서만의 時限的이며 局限한 場所內에서의 限定된 行爲로 끄치는 것은 참 信仰이 아니다. 行動的 신앙은 全生活 · 全思考 모든 言行이 바로 信仰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 삽질을 하고 바느질을 하며 글을 쓰는 그 自體가 바로 信仰이다. 生活한 信仰은 神을 위한 奉仕하는 바로 그것이다.
(文責在 記者)
盧 다니엘(哲博 · 가톨릭大神學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