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 꽃들 (19)
丙寅殉敎紀念(병인순교기념) 10萬圓(만원) 戱曲當選作(희곡당선작)
발행일1967-10-01 [제587호, 4면]
박노인=아가! 우리 아가! 천당에서 만나자꾸나.
재운=(아녜스를 안고 몸부림 하며) 아가씨! 나를 버리고 어델 가요 아가씨 대장부다웁게 정의와 사랑을 위해 살라 하시더니 왜 혼자 가요 아가씨.
포교들=(모두 울며 눈물을 닦는다) 사또님! 사또님! 진정하십시요.
재운=(칼을 들고 일어나) 이! 무정한 하늘아 네 입을 열어 말을 하려므나 이제 모든 것이 끝났노라고. 내 사랑도 꿈도 모두 헛된 것이었노라고. 아! 산천초목들아! 그대들은 왜 말이 없느냐 내 사랑 순결하고 아름다웠노라고! 아! 이제 내 사랑 꽃잎 지고 내 별은 떨어지고 어두운 길에 슬픔을 헤치며 그대 사랑의 빛을 찾아 가거라
재성=사또 진정하오.
포교들=사도님! 진정하십시요.
재운=아! 모두 다 비웃어라 왜 말이 없느냐 하늘도 무정하고 나 너는 왜 눈물을 흘리지 않느냐 강산아 너는 왜 피를 토하지 않느냐 세상은 무정하고 무상한 것 악신은 내 사랑을 집어 삼키고 피 묻은 아가리로 나를 비웃는고나 하늘은 문을 닫고 태양은 빛을 거두어 내 슬픔과 함께 영각으로 가거라. 아! 이제 모든 것이 끝났도다. (아녜스를 바라보며) 아가씨! 아가씨!
박노인=(힘없는 소리로) 사또! 전정하오
재운=아가씨! 그대의 사랑을 찾아 당신 곁으로 가겠오이다. 부디 우리의 슬픈 사랑을 엮어 한 무덤에 묻어주시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랑 저승에서나 꽃피우리다. (순간 칼로 자결하려 한다)
재성=(재빨리 칼을 붙들고) 이 사람아! 이게 무슨 짓인가 재운이!
포교들=(칼을 뺏으며) 사또님! 사또님! 진정하십시요.
재운=놓아주오 형님! 나의 별은 이미 빛을 잃고 흘러버렸읍니다. 어두움만이 남은 이 세상에서 나의 목숨이 무슨 보람이 있겠읍니까?
박노인=사또! 그것만은 아니되오
재운=(쓰러져 있는 할아버지를 붙들고) 할아버지 어찌해서 아니되옵니까? 아가씨도 장원급제 하는 것보다는 정의와 사랑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이 더 위대하고 영광스럽다고 하였읍니다. 의를 위해 살다 사랑을 위해 죽어가는 것이 대장부가 아니겠읍니까?
박노인=사또! 우리 아기가 서러워 할 일이요 부-부디 참으로
재운=아! 아가씨!(울면서 품속에서 아녜스가 주던 목거리를 꺼내어 주머니를 열어 쪽지를 읽는다) 그대의 정성과 사랑의 정표라고 주더니 나를 버리고 가시다니 아가씨!
박노인=사또! 아직 그것을 볼 때가 아니오
재운=(기쁜듯이 일어나) 아! 아가씨! 아가씨가 내게 세례를 주시다니(하늘을 우러러) 오! 하느님! 천주님!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내 이름은 주님을 위해 목숨 바쳐 피흘린 스데판!(박노인에게 가서) 할아버지 놀래지 마서요 소생 이미 돌아가신 할머님에게 천주교를 배우고 천주님을 마음속으로 섬겨왔읍니다. 할아버지 기뻐해 주십시요
박노인=반갑소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오. 우리 아기가 얼마나 기쁘겠오!
재운=(다시 아녜스에게 가서) 아가씨! 잘 알았오이다. 나도 천주님의 아들로서 당신의 뒤를 따라 거룩하게 가겠오이다. 아가씨!
재성=(크게 놀라며) 여보게 재운이!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재운=형님! 천주교회는 진실되고 거룩한 종교입니다. 진리와 사랑만을 위해서 살고 진리와 사랑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명예와 부귀영화도 생명도 초개같이 버리고 거룩하고 깨끗하게 죽어가는 것이 천주교 신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여기 절개를 지니고 거룩하게 숨져간 할머니와 아가씨의 용기와 사랑을 보십시요. 우리 이판서님과 그의 가족이 모두 천주교신자로서 거룩하게 죽어가지 않았읍니까?
재성=(울면서) 재운아! 네가 천주학군이라니 다 망했구나 망했어!
재운=(재성의 손을 잡고) 형님! 저의 소행을 너무 원망하지 마십시요. 사나이 정의와 진리 그리고 주님의 참된 사랑을 위해 죽어가는 것이 얼마나 보람되고 떳떳한 일입니까? 의리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같이 버리는 천주교 신자들의 정신을 따라야만 나라가 바로 서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할 수 있으며 천주교회의 정신을 따라 동포들을 제형제 같이 사랑한다면 당쟁도 세도싸움도 없어지고 이 나라에 평화와 번영이 올 것입니다. 저의들의 죽엄은 결코 헛되지 아니하여 언젠가는 영광스러이 꽃피어 이나라에 참된 평화와 행복을 가져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
재성=(울며) 재운이! 재운이!
재운=(포교에게) 자! 나도 천주학꾼이니 어서 묶으시요.
포교A · B=(재운의 손을 잡고 울며) 사또님! 사또님!
재운=자! 어서 묶으시요.
하인=(재운에게 매달려 울며) 도련님!
박노인=(쓰러진 채로 울며) 스데판!
모두 재운이에게 매달려 슬피 울며, 서서히 막과 함께 성가소리! 「주여! 어서 오소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