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잎새들이 발아래 구르는 조락의 계절이 되면 우리는 무언가 유수한 사모의 정 같은 것을 품게된다. 이것은 결핍에 대한 동경이요 망각에 대한 기억이며 생의 청량제이고 해방에 대한 모색이다. 세월에 쫓기며 숨가쁘게 그날 그날을 날려보내고 섬돌 아래 귀뜨라미소리를 듣고서야 가을이 문전에 온 것을 놀라게 된다.
우리들은 소녀처럼 감상에 젖는다. 이럴때면 독서는 일층 형이상학적 치유와 회복의 묘방이 된다.
책에는 언제나 그윽한 풍경의 역사가 있다. 노인의 슴가안에 부활하는 소년의 청순한 사랑이 있고 진애(塵埃)에 묻혀 살면서도 우리를 드높이는 화해와 초월의 피안이 있다. 새롭고 순수한 경험이 우리를 진보케 한다. 생소한 이방의 旅程에서도 결코 나그네일 수 없는 「휴메니티」의 광장이 있다. 진기와 경탄, 진실과 숭엄에 찬 형상의 미가 있고 푸른 풀밭에서 뛰노는 향기로운 사슴의 체취가 있다.
우리들은 어떤 택을 읽엇느냐고 물었을 때 그것은 일찍 다보았노라 한다. 그러나 진정 단번에 味致될 책이 과연 있을까? 중국의 林語堂은 다음과 같이 음미할만한 말을 했다. 『少年에 책을 읽는 것은 문틈 사이로 달을 보는 것과 같다고 中年에 책을 읽는 것은 정원에 나와 산책을 하면서 달을 보는 것과 같다고 老年에 책을 읽는 것은 높은 망루에 올라 안하에 사방을 바라보면서 달을 쳐다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확실히 우리들에게는 기다려서 체득될 연륜이 있다. 이것은 안타갑기는 하나 결코 악덕은 아니다.
내가 십대에 괴테를 접했을 때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벅찬 가슴과 애띈 소년의 눈으로 바라보는 불가사의의 하늘이었다. 희미하나마 이상한 그 꿈을 해석하려고 얼마나 두고 두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십대에 다시 읽었을 때 그것은 나의 청춘의 詩가 되었고 나대로의 사상을 형성하는 모든 계기가 되었다. 결국 나는 저 「베토벤」이 평생의 「못또」로 했던 「쉴러」의 말 「고통을 통해 기쁨을」 찾는 인생 파우스트의 구제를 보았던 것이다.
우리세대는 비교적 독서를 하지않고 살아온 후회를 유독, 이 계절에사 반추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젊은이가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스포츠」와 영화와 유희가 그것을 대신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쁜 세월에 신문조차 차분히 읽기 힘든다고 고백한 동포를 본다. 아마도 현대인이 독서하기엔 너무도 많은 것을 잊어야 될 것 같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복잡하고 소움 투성이고 공연히 바쁜 세월을 떠나서 외딴 고적을 찾을 길 없다. 확실히 목가적 낭만의 시대는 우리의 주변에서 사라진지 오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없어 책을 읽을 수 없는 우리자신 안에 더욱 마음의 여유를 갖기를 권하고 싶다.
우리들이 권태로움을 해소시키려고 「까싶」과 유희와 「스크린」에 바친 시간중단 몇분의 일이라도 양보받고 싶다. 하루24시간에서 적어도 2·40분정도의 시간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지속하기 어렵다면 아침15분 저녁15분 정도야 낼 수 있지 않을까. 이리하여 3·40년 독서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만년에 놀랄만한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습관이야말로 위대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읽어야 할 책들에 대해서는 이미 적절한 의견과 충고가 주어져 있어 다행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우리들이 좀더 성실의 인이 되기 위해서 읽을거리를 찾는다면 읽어야 할 책을 알게될 것이다. 실로 사람들은 성실의 길 외이 것은 무엇이고 너무 빨리 배우는 것 같다.
우리는 조그마한 「노트」를 하나 준비해 두자. 읽을 때 무엇이고 사라서 다시 음미할 수 없을까봐 아쉬운 그런 대목을 짤막하게 「노트」해 두어도 좋고 자기의 단상들을 단 두서너마디의 낱말로 써넣어도 좋다. 이런 것은 후일에 얼마나 행복한 정신적 유산이 될런지 모른다. 절대로 조바심이나 무엇에 쫓기는 심정으로 책을 읽지 말자. 완전한 자유, 완전한 해방감으로 돌아가 책을 펴야 한다.
이에는 하나의 수양이 필요하다. 고요하고 서서히 작품에 젖고 주옥같은 이야기의 분위기에 몸을 묻자.
독서하는 사람의 마음은 「만물 속에 눈물이 어리어 있도다」라고 한 버-질의 詩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푸른 풀밭에서 마른 풀만을 골라먹는 가련한 짐승이 될런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종교나 철학이나 사상에 관한 책을 읽을 때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기도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즉 是也快재를 부를만큼 내 마음에 들었을 때 나는 「어떤 몹슬 악마가 나를 誤導하기 위해 이처럼 황홀하게 이데올리고로 분장하고 나를 꾀이나이까? 주여 나를 지키시옵소서」라고 반대로 그 책이 별로 흥미가 없어 몇 줄 안 읽고 내던지고 싶다거나 무취미 하고 난삽하고 퇴색된 언어 매력없는 언어로 나타났다면 나는 「주여 진정 진리가 이안에 있는지 모르는데 악마가나를 시기하여 이처럼 언어를 퇴색시켜 매력없는 따문한 책으로 나를 우롱하는지 모르겠나이다. 내게 독파의 용기를 주소서」라고.
이리하여 지독한 이방인이였던 나는 결국 나의 괴벽 「딜렛탄트」에서 끝내 하나의 경쾨한 축복을 맛본 것 같다.
임기석(大建神學大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