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蟋蟀(실솔) (1) 兄弟(형제) ①
발행일1967-10-08 [제588호, 4면]
장기 한판을 끝내고 물러났을 때 윤식의 창백한 얼굴은 땀에 흠싹 젖어 번들번들 빛이 났다. 손수건을 끄내어 땀을 닦는데
『웬 땀을 그렇게 흘리니?』
담배를 붙여물고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앉아 피어올라 가는 담배연기를 바라보며 정식이 말했다.
『모르겠어. 밤낮 식은 땀이 지근 지근 베어 기분이 나빠』
『몸이 어디 나쁜 것 아냐? 병원에 가보지 그래 』
『병원?』
반문하며 치껴뜨는 윤식의 눈 흰자위는 유리처럼 투명해 보였고 굵게 줄음을 지운 이마에는 새로운 땀이 솟아나고 있었다.
(저녀석이 이 옛날에는 계집애처럼 얌전햇었는데 웬일일까? 자꾸만 변해간다. 어딘지 험악하단 말야. 저 눈은 누굴 저주하는 것 같다. 공포에 쫓기고 있는 것 같다. 당장 발광을 하며 소리 지르고 덤벼들 것만 같다. 아까 장기를 둘 때 저녀석은 중풍이 된 늙으니처럼 손이 떨리고 있었더. 누굴 치고 싶은데 참는 것처럼 손이 떨리고 있었어. 한번씩 집에 올라올 때마다 저녀석은 변해 있단 말이야)
정식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식은 땀 흘리는 것 좋지 않어. 나쁜 꿈꾸는 것 아냐?』
그말을 하는데 정식은 묘한 기분을 느낀다. 자기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동생에 대하여 일찌기 부드러운 그런투의 말을 해 본 기억이 없었던 것이다.
(계집애 같은 새끼! 날 따라오지마! 따라오지 말래도!)
그 말이 윤식이를 향해 쓰여지는 정식의상투어였었고 언제나 외톨배기인 윤식에게 별다른 정을 느껴본 일이 없었던 정식이었다.
윤식은 찌그러진 미소를 띄우며
『나쁜 꿈?』
하다가
『나쁜 꿈이야 항상 꾸지. 백주대로에서도 나쁜 꿈을 꾸는걸. 지금 이 순간에도 나쁜 꿈을 꾸고 있는지 몰라. 난 철갑을 씌운 죄인이란 말이야. 주먹을 쥐고 뚜디려도 꿈적 않는 철갑 속의 죄인이야. 그래서 자꾸만 이리 땀이 흐르지 않어?』 그 말이 정식에게는 무섭게 들렸다. 윤식은 쏘파에 가서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불안한듯 방 안을 한바퀴 둘러보고 다음에는 먼지가 앉아 있는 현광등을 올려다보고 차츰 공허해진 눈동자는 천정을 더듬더니 벽으로 기어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눈은 한폭의 그림 위에서 딱 멎었다. 공동처럼 꿩해진 누에 벼란간 부서지듯 강렬한 빛이 모여들었다.
그림은 중늙은 남자의 초상이었다.
타락한 화가가 몇푼의 돈을 받고 실물을 정직하게 묘사한, 아니 실물보다는 조금 장중하고 엄숙하게 그리고 좀더 잘나게 그려놓은 사진 한장의 갑어치보다 더 나올 것이 없는 초상화였었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정식과 윤식의 부친이었던 것이다.
그림의 인물과 대결이라도 하듯 증오의 시선을 집중하던 윤식은 마루바닥에 비스듬히 앉은 정식에게 급격한 각도(角度)를 이루며 얼굴을 돌렸다.
그들의 눈이 일순간 부딪쳤다. 무의미한 순간이었다.
『형』
『왜』
『형은 여잘 알았어?』
느닷없이 묻는 말에 정식은 적잖게 당황한다.
『무슨 말이야?』
『몰라서 묻나? 그런 여자 집엘 가봤느냐 그 말이지』
귀뿌리까지 붉히며 정식은
『미친 소리 작작해』
수치심보다 윤식이 어느새 자기보다 성숙해진 것 같은 말투에 정식은 화가 났던 것이다. 그리고 놀라웠던 것이다. 윤식의 나이또래가 되는 다른 청년의 입에서 그말이 나왔다면 싱긋 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식은 윤식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는 것은 정말 예기치 않았던 일이었다.
그의 부친은 (저건 사내새끼가 아니야 따라서 내 아들도 아니란 말이야. 계집애가 될려다만 놈이지. 우리 문중엔 일찌기 저런 놈은 없었거든.) 곧잘 그런 말을 했었다. 성질이 괄괄하고 고집이 세며 영웅전을 즐겨 읽던 그들의 부친은 내성적이며 말이 없고 온순한 윤식을 늘 사색에 잠긴 듯 처신하면서 결코 부친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혀 그는 조용한 성격을 방패삼아 부친을 피하는 것 같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윤식은 수재였고 모범생이었다. 그러던 그가 S대 법과에 들어가면서부터 이상하게 되기 시작한 것이다 시험때가 되면 그는 책상앞에 붙어앉아 밤을 꼬박히 밝히는데도 이튿날 시험장에서는 마치 망실환자처럼 시험지를 노려보다가 백지를 내는 그런 증상이 나타나고 성미도 거칠어지는 것이었다. 두 아들에게 별관심이 없었던 그들의 어머니도 윤식의 낙제소식을 들었을 때는 얼굴이 창백해 졌던 것이다.
『아니 이 이게 어떻게 된거지? 아 여보 이거 어떻게 된거예요?』 창가에서 손톱을 다듬거나 아니면 얼굴을 매만지며 남과 별로 사귀는 일이 없는 그들의 어머니.
『그래 내가 뭐랬소? 삯수가 노오랗다 하지 않았소? 뭐 흥분할 것도 없고 된대로 살게 마련 아니오』
아버지는 내뱉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