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나보고 싶은 사람 放送(방송) 對談(대담)] 옛날의 그 모습 약현성당
교회 건물로는 한국 최초
內外(내외)하느라고 男女席(남녀석) 사이에 벽 쌓고
宰相家(재상가) 많고 이완용이 쫓겨난 유서있는 洞里(동리)
이=어제는 명동성당에 관해 좋은 말씀 많이 들었읍니다.
오늘은 약현성당(중림동) 역사를 들려 주십시요.
오=네. 약현(藥현)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옛날 약봉(藥峰) 선생의 주택이 있던 곳인데 그 아호를 따서 약현이라고 했다고도 하고 옛날에 이곳에 약식이 유명해서라고도 합니다.
또 일설에는 약봉선생이 취미로 약포를 재배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성당터는 1892년 정 신부가 땅을 매입해서 정지작업을 한 후 한국에서는 최초로 붉은 벽돌과 청벽돌로 교당을 지은 것인데 물론 예배당으로나 성당으로나 약현성당이 교회건물로서는 처음입니다.
둘째번으로 지은 것이 명동성당입니다. 청국전쟁 당시 지은 것으로서 벽돌은 남대문옆 「와서」 혹은 「와현」이라고 하는 곳에서 구은 것인데 70년이 넘도록 색갈하나 변치 않고 단단하니 얼마나 벽돌을 잘 구웠고 또 집도 잘 지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그 성당설계한 사람은 누굽니까?
오=「코서」신부님이 설계하고 직접 그분이 지었답니다. 그 신부님은 건축가인데 설계도 잘했어요. 지금도 내부에 들어가 보면 기둥이 양쪽으로 두 줄서 있는데 그 시절엔 내외가 심해서 성당 한 가운데에 벽을 쌓고 남자석 여자석을 따로 만들었는데 중년에 벽을 헐은 것입니다.
이=내외 소리가 나오니 생각납니다만 장면 박사께서 이 성당에서 혼배 했다는데요.
오=그렇습니다. 장면씨가 혼인할 때도 성당가운데 벽을 두고 양쪽 방에 따로따로 서서 벽사이 구멍으로 부인이 손을 내밀고 장면씨도 그 구멍으로 혼인반지를 끼워주었다는데 첫 애기를 낳을 때 까지도 부인의 얼굴을 몰랐다고 했읍니다.
이=참! 기막힌 시절이었읍니다. 그리고 김욱, 김재찬 父子가 다 재상 노릇하던 유명한 가문이 약현에 있었고 또 이완용이가 이곳에 살다가 매국노의 집이라고 동내 사람들이 불을 질러 시내로 쫓겨 갔다고도 하더군요.
오=한국에서 전차를 처음 움직인 「골부란」의 집도 이곳에 있었대요. 그리고 지금 성당아래 남아있는 몇채의 집을 정 신부가 약명성당이라고 부르며 개화된 신 학문을 가르쳤는데 나중에 가명학교, 가명보통학교라고 이름을 바꾸었어요.
그리고 총회장이 살던 집은 얼마전에 사무실을 짓느라고 헐었는데 저는 상당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고적을 자꾸 헐어치우면 마음이 허전해 집니다.
이=역사적인 고적은 될 수 있는 대로 보존하는 것이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