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아 司牧(사목) · 敎理硏究(교리연구)」 參席記(참석기)
亞洲(아주)敎會(교회) 大會(대회)에 無關心(무관심)
參席者(참석자) 거의가 神父(신부) 信者(신자)는 單(단)5명
後進性(후진성) 如前(여전) · 大會(대회)운영 西歐(서구) 神父(신부)가
現行(현행)豫備者(예비자) 指導(지도) 生活(생활)한 信仰(신앙) 아닌 知識傳達(지식전달)뿐
나는 왜관 「성베네딕도」대수도원에 속한 평신자이다. 나는 본 대수도원 오 오도 아빠스님의 평신자 사도직 양성계획하에 「마닐라」 「아테네오 대학 아세아사목연구소」에서 사목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 계획을 즐겁게 받아들인 동 사목연구소에서는 나를 「아세아 사목, 교리연구 주간」에 평신자의 한 사람으로 아빠스님을 통하여 초청하였다.
사목연구소의 학장신부님의 말에 의하면 이때까지 각국의 주교님들께 이곳에 학생들을 보내줄 것을 의뢰했지만 그때마다 대부분의 주교님들은 신부님, 수사님, 수녀님 중에서 선발하여 보내어 왔을 뿐이라고 말하며 이어 오 오도 아빠스님의 평신자 양성의 결단성과 진보적인 사상에 한결같이 칭찬과 감탄을 아끼지 않고 있다.
「가톨릭시보」에 기보된 바와 같이 지난 「아시아 사목, 교리연구주간」 참석자의 명단을 살펴보면, 전원 1백60여명중, 주교님이 13명, 신부님, 수사심, 수녀님이 1백40명, 나머지 5명 정도는 평신자였다.
이 회의는 「아세아 사목, 교리연구주간」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실은 그 규모로 보아 「아세아의 공의회」와도 같았다.
아세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와 대표자들이 거의 다 참석하여 진지하게 토의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루어진 여러가지 문제는 이 주간에 참석했던 분들이 분과별로 「가톨릭시보」를 통하여 발표되었다.
나는 다만 평신자의 입장에서 본 좁은 소견으로 몇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우선 내가 이 연구 주간에서 먼저 느낀 것은 아세아는 아직도 수동적인 전교지방이라는 위치를 탈피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중대한 「아세아」의 연구주간동안 아세아인이 아닌 외국인 신부님들로 인해서 진행되었고 참가율로 보거나 발언율로 보아도 그렇다. 수동적 전교지방이란 관점은 대만의 나(羅) 대주교님의 말씀을 들어보아도 알 수 있다. 즉 『지금까지의 아세아의 전교문제는 외국인 전교신부님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가져왔으며 본방인 성직자나 교리교사들은 이 문제를 소홀히 하였다. 포교의 토착화는 외국인 신부님들이 서두를 것이 아니라 본방인 신부님들이 각성해야 한다. 하지만 본방인 성직자들 자신이 자기나라 민속과 문화에 대하여 무식하니 어떨게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본방인에게 적응시킬 수 있겠는가』고.
이렇게 개탄하는 나 대주교님의 순수한 중국옷 차림의 주교복은 참으로 어울렸다.
그 분의 발언과 옷차림은 그대로 일치되었다. 그러나 그 주교님의 중국옷차림을 주의깊에 살펴본 사람은 몇사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곳에서 다루어진 문제가 중요성을 띠었고, 또 광범위했기 때문에 우리 한국 대표들은 연구주간동안 별도로 수차례 모여 우리가 한국에 가서 이 문제들을 어떻게 반영시키고 적응시키느냐에 대한 회의를 가진바 있었다. 지금쯤은 그분들이 이곳에서 계획한대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때의 그 열의가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 이제 나는 이 주간을 통하여 나의 짧은 교리교사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몇가지 문제점을 생각하여 보았다.
■ 첫째 본당가정에 있어서 예비신자 교리교육
현재 대부분의 본당가정에서는 예비신자를 위한 교리교육(일반적으로 6개월)이 실시되고 있지만 대체로 학교식 교육의 모방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한정된 교리시간 이외에는 그들의 생활문제는 별로 취급되지 않고 있다. 마치 학생이 학교에 등교하고 하교하는 것처럼 교리교육은 그들 예비신자들이 어떠한 동기로 이미 받은 신앙의 은총에 기초를 두어야 할 것이다. 고로 교리교육의 목표는 이 은총을 그들에게 전하여 주는 것도 아닐 것이며 또는 이 은총을 받도록 준비를 시키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예비신자들이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앙의은총을 발전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위치와 현재의 상태를 올바르게 자각하도록 지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설득이나 강조를 거듭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아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일 어떤 본당에서 아동들에게 아침미사 참여 장려, 교리반 참석 장려로 「카드」(참석표)를 나누어준다면 아동들은 결국 표를 많이 모아 나중에 상타기 위하여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이들이 이런 식으로 자라나 어른이 되면 어떠한 신자생활을 하게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여기에는 교육심리학에서도 그 근거가 있다. 바라건대 영세찰고가 졸업식 기분을 내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세계를 받으면 그것으로 그만인줄 안다. 교리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교리교사는 이들 예비신자들 자신이 자유스럽게 양심의 결정에 따라 자기들의 책임을 이해하도록 지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가 교사로서 선생으로서 그들 앞에 서기에 앞서 그들의 생활 속에서 그들과 함께 그리스도안에 형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 계속 -
成응제(교리교사)